현실에 지친 이들이 찾는 안락함… 오늘도 어른들은 ‘위로’를 산다

입력 2020-01-04 04:05
라인프렌즈

캐릭터가 일상에 들어왔다. 카카오프렌즈의 라이언 얼굴을 닮은 빵, BT21이 그려진 화장품 같은 기호품은 물론 치약 샴푸 등 생활용품에도 친숙한 캐릭터들이 담겨 있다. 아이들의 물건뿐 아니라 어른들의 일상생활에도 캐릭터 제품들이 나름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는 유치하다며 선을 긋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캐릭터의 세계에서 완전히 발을 빼기란 쉽지 않다. 2003년 뽀로로, 2012년 카카오프렌즈, 2019년 펭수로 이어지는 21세기의 캐릭터들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스토리가 있고, 추억을 공유하고, 가치관을 나누고, 공감을 담은 ‘캐릭터’를 기꺼이 소비하고 향유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펭수

모든 세대를 아우르며 사랑받고 있는 EBS 연습생 펭수는 한국 캐릭터 문화와 산업의 현재를 보여주고 있다. 펭수 에세이 다이어리 ‘오늘도 펭수, 내일도 펭수’는 지난달 23일 정식 출시된 뒤 1주일 만인 30일 8만부 이상 팔리며 신드롬을 증명하고 있다. 펭수의 인기는 광고와 컬래버레이션(협업)으로도 확인된다. 이랜드월드 스파오가 펭수와 협업해 판매한 맨투맨티, 반팔티, 수면바지 등 상품 11종은 3시간 만에 완판됐다.

이랜드월드 스파오가 펭수와 협업해 만든 티셔츠들은 3시간 만에 완판됐다. 스파오 제공

캐릭터의 인기는 공유와 구매로 이어진다. 동원참치는 펭수를 광고 모델로 세우고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펭수가 부를 광고 음악 ‘넥스트 참치쏭’ 투표를 진행 중이다. 투표 닷새 만에 채널 구독자 1만3000여명의 5배 가까이 되는 투표 참여 수(6만2000여건)를 기록했다.

박찬규 제일기획 광고기획 팀장은 “인기 캐릭터와의 협업 마케팅은 기존 캐릭터가 보유하고 있던 팬덤을 통해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브랜드 홍보 효과를 거둘 수 있고, 구매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며 “동원참치 광고도 펭수의 팬덤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의 영역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캐릭터 제품들은 어떻게 성인의 일상에까지 파고들게 됐을까. 캐릭터 소비는 친근함, 공감, 향수, 안정감, 편안함 등의 긍정적인 감정을 충족시키는 행위로 해석된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캐릭터 제품에 거부감을 갖지 않고 기꺼이 지갑을 여는 것은 캐릭터가 주는 ‘위안’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펭수와 같은 캐릭터는 복잡하고 경쟁적인 현실의 피로감을 덜어주고, 걱정 없던 어린시절의 안락함을 떠올리게 해준다”며 “캐릭터는 유행을 타는 측면도 있는데 유행을 따라가면서 얻게 되는 공감, 팬덤이 주는 소속감 또한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긍정적인 요소”라고 분석했다.

캐릭터 상품이나 캐릭터와 협업한 제품들은 ‘콘텐츠’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도 차별화된다. 기술의 발달로 제품의 기능성이 상향 평준화하면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같은 제품도 이야기를 품고 있느냐, 그저 기능에만 충실하느냐에 따라 소비자들의 선택이 달라진다.

라인프렌즈가 샤오미 MI9 SE와 협업해 브라운 에디션을 출시해 인기를 끌었다. 카카오프렌즈는 홈케어 디바이스 ‘카카오프렌즈 홈키트’ 스마트 체중계를 들고 ‘CES 2020’에 참가한다. 라인프렌즈의 BT21과 컨버스가 협업한 제품들이다(왼쪽 위 사진부터 시계방향). 각사 제공

카카오프렌즈를 입은 나이키 한정판, 어벤저스로 무장한 갤럭시S 한정판, BT21로 채운 컨버스 한정판 등은 이런 이유로 만들어졌다. 인기 캐릭터는 보편성을 갖고 있지만 인기 캐릭터와 협업한 제품들은 보통 ‘한정판’이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평범한 캐릭터가 희소성을 얻으면서 더욱 특별해진다.

패션업계 한 관계자는 “어디가 더 멋진 옷을 만드는지가 물론 중요하지만 어떤 스토리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가느냐에 따라 흥행이 갈리는 일이 허다하다”며 “업계가 장르를 넘나들면서(크로스오버) 다양한 컬래버레이션 한정판을 내놓는 건 이런 이유에서”라고 말했다.

캐릭터나 관련 상품(굿즈)이 상업적 가치를 뛰어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친근한 캐릭터에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투영하는 식으로 캐릭터의 의미를 다른 영역으로 끌어올리기도 한다. 판매 수익금을 기부로 연결시켰던 ‘무한도전 달력’은 ‘굿즈 판매 수익금과 기부’를 나란히 떠올리게 만든 대표적인 사례다.

캐릭터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적·사회적 신념을 표현하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 사진과 캐릭터로 만든 달력, 수첩, 메모지 등 ‘이니 굿즈’는 정치적 지지의 한 형태로 발전했다. 지지하는 정치인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제작해 집회에 입고 나간다거나 환경운동 동물보호운동 채식주의 등 추구하는 가치를 드러내는 문구나 이미지로 머그·손수건·담요·모자 등의 굿즈를 만들어 불특정 다수와 나누기도 한다.

스타벅스는 매년 12간지 머그잔을 출시하는데 올해는 ‘쥐의 해’ 기념 머그잔을 내놨다(왼쪽). 스타벅스가 프리퀀시 사은품으로 내놓은 펜은 연말이 되기 전 품절됐다. 스타벅스 제공

캐릭터나 굿즈는 책, 만화, 영화, 방송 등 미디어에서 만들어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브랜드 자체가 일종의 캐릭터처럼 소비되는 경우도 있다. 스타벅스가 대표적이다. 스타벅스 로고가 담긴 머그, 텀블러, 플래너, 볼펜 등의 제품(MD·Merchandise)은 새로 출시될 때마다 모으는 수집가들이 있을 정도다. 연말을 달구는 스타벅스 다이어리는 지난 연말에도 품절 사태를 빚었고, 처음 출시된 볼펜은 일찌감치 재고가 소진됐다.

스타벅스 한정판 텀블러를 모으는 이정은(35·프리랜서)씨는 “스타벅스에서 일을 할 때가 많은데 힘들 때마다 예쁘고 감성적인 MD를 사면서 위로를 받는다. 예전에 산 텀블러를 보면서 그 당시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것도 좋다”고 말했다.

사진=게티이미지

스타벅스커피 코리아는 MD 디자인을 담당하는 크리에이티브팀을 따로 두고 있다. 스타벅스가 진출한 80여개국 가운데 미국을 제외하고 자체적인 디자인 전담 부서가 있는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연말 핫아이템인 스타벅스 플래너는 연초부터 기획에 들어가 꼼꼼하게 준비한다. 스타벅스 관계자는 “좋아하는 커피 브랜드를 언제 어디서나 경험할 수 있다는 게 스타벅스 MD 제품의 인기 비결”이라며 “기능성에도 충실하지만 패션 아이템으로 활용하기에도 좋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