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지방은 ‘헬도라도’

입력 2019-12-31 04:01

요즘 언론에는 ‘김기현 전 울산시장 청와대 하명수사’ 사건의 검찰 수사 내용이 연일 실리고 있다. 마치 수십 겹으로 이뤄진 양파처럼 한꺼풀 한꺼풀 벗겨지는 사건의 실체를 보면서 떠오른 영어 단어가 있다. ‘헬도라도(helldorado)’라는 말이다. 지옥을 뜻하는 영어 ‘헬(Hell)’과 ‘황금으로 둘러싸인 땅’을 뜻하는 ‘엘도라도(El Dorado)’를 합쳐 만든 미국식 속어다. 엘도라도는 18세기 남미를 정복하려던 유럽인들 사이에 퍼졌던, ‘브라질 아마존강 인근에 황금의 나라(엘도라도)가 있다’는 루머가 퍼지면서 일반명사가 된 단어다. 미국 문학가들은 서부시대의 캘리포니아를 헬도라도라고 불렀다. 너도나도 사금(砂金)을 캐내려고 몰려들어 온갖 불법과 횡포, 범죄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송병기 현 울산 부시장이 김기현 전 시장 시절 울산시 고위직에 있다 사직하면서 사건이 시작됐다는 게 지금까지의 검찰 수사 결과다. 송 부시장이 김 전 시장 측근 비리를 줄기차게 고발했던 건설업자와 결탁해 청와대에 ‘비리 리포트’를 쓰고, 청와대는 이 리포트를 확대 재생산해 경찰에 하명수사를 하게 했다는 것이다.

하루 전 한 언론은 그런 송 부시장이 울산 북구 신천동의 한 대단지 아파트 근처 땅을 5년 전부터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송 부시장 소유 토지 앞의 아파트는 2015년 4월 시 당국의 사업승인을 얻어 건설이 시작됐다. 이보다 넉 달 앞선 2014년 12월 이 사업 심의 당시 송 부시장의 직함은 울산시 건설교통국장이었다. 해당 아파트 사업건을 소상하게 알 수밖에 없는 자리로, 인허가에 영향을 미칠 수도, 인허가 진행 정보를 파악할 수도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문제의 토지를 구입했고, 지금 이 땅은 두 배 이상 올랐다. 부동산업자들은 상업용 부지인 이 땅에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면 시세차익은 10배가 넘을 수도 있다고 한다.

송 부시장은 송철호 현 울산시장의 측근 중에서도 최고 핵심으로 꼽힌다. 송 시장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당선시키기 위해 청와대발(發) ‘공약회의’를 주도하고, 재선이 확실시되던 김 전 시장을 낙마시킨 주역을 중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울산에선 시 예산의 70% 이상을 송 부시장이 주무른다는 소문이 나돈다고 한다. 선거법 위반 혐의뿐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챙긴 개발이익에 대해서도 수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대목이다.

울산은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다. 인구로는 7번째지만, ‘대한민국의 굴뚝’이란 별명답게 수많은 대기업과 중화학공업 단지가 조성된 곳이다. 이런 대도시 시장의 첫 번째 의무는 절대로 사적 이해관계에 빠지지 않는 일이다. 개인적 이익에 연연하면 각종 시정 사업이 전부 흐트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럴듯한 공약을 내걸고 선출된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임기도 마치지 못한 채 사법처리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이권에 개입해 자신의 금전적 이익을 챙기거나, 선거 과정의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한창 수도권 일대 신도시가 만들어질 때 지방선거로 선출된 시장과 군수들이 건설회사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은 혐의로 단죄됐었다.

검찰 수사로 실체를 점차 드러내는 울산시의 형상도 이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 아니 더 추잡하고 더 진절머리가 난다. 기획 선거로 집권한 현 시장의 뒤에 숨은 부시장이 사익까지 도모했다 하니 말이다.

지자체의 곳간은 자체적으로 걷은 각종 지방세, 각종 정책 예산 등에 재정자립도가 낮더라도 중앙정부에서 지원받는 지방교부세 등이 있어 늘 부족함이 없다. 연말만 되면 남은 예산을 아무 데나 펑펑 쓰는 지자체가 가득하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국민의 혈세가 지자체의 ‘눈먼 돈’이 되지 않으려면, 쓰임새를 감시하는 눈이 지금보다 더 많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방정부는 여전히 100여년 전 캘리포니아와 같은 헬도라도에 머물 개연성이 높다.

신창호 사회2부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