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올라온 우리 가족은 동향인이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로 갔다.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다시 고향으로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다. 부산에서 임시로 천막을 치고 예배드리던 평양교회는 서울로 올라와 ‘시온교회’란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교회엔 평양과 진남포 등지에서 살다 홀로 남하해 의지할 곳 없는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어머니는 예배 후 애찬 준비에 정성을 다했다. 교회에서 먹는 한 끼로 하루를 사는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국수 카레라이스 국밥 등으로 메뉴를 바꿔가며 외롭고 힘든 청년들을 챙겼다.
우리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 모두 시온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나는 시온교회 교회학교 초등부 1회 졸업생이다. 교회 중등부와 고등부를 거쳤고, 대학생이 된 후엔 교사와 중등부 부장, 고등부 부장을 했다. 평생 멘토인 한승호 목사님도 초등부 때 만났다.
한 목사님은 늘 성도들에게 삶의 기본을 가르쳤다. 이게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사는 시작이라고 했다. 또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 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자기가 뭘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렇듯 나는 ‘시온동산’이라 부르는 이 교회에서 삶의 기본을 배웠다.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 서로 돕고 격려하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일이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교회에서 어머니의 헌신은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돕는 차원이 아니었다.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는 힘을 기르는 일이었다.
아동인권 감수성도 시온동산에서 키웠다. 자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란 깨우침도 이때 얻었다. 한 목사님은 “아이는 모두 다르다. 하나님이 아이들 하나하나에 준 달란트가 있다”고 했다. 비교하면 경쟁하게 되고, 경쟁하면 차별하게 된다.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건, 크리스천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기에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이다.
당시 나는 나처럼 진남포에서 태어났고 부산에서 살다가 서울로 와 시온교회에서 성장한 한 청년과 소꿉친구처럼 지냈다. 나보다 1년 6개월 먼저 태어났지만, 허물없는 친구로 지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의논했고, 항상 같이 다니며 서로 의지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중매가 들어왔다고 했다. 아버지 친구가 캐나다에서 의사로 일하는 지인이 프랑스어를 하는 여성을 찾는다며 나를 맺어주고 싶다고 했단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거지, 언어 구사 여부로 결정하는 게 아니다. 그게 결혼 조건이 된다는 게 화가 났다. 그 자리에서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버렸다. 놀란 아버지는 누군지 물었고, 나는 소꿉친구 이름을 말했다.
아버지는 “사랑만으론 살 수 없단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군 복무 후 대학 3학년이었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사랑만 있는 건 아니에요. 우리에겐 살아갈 능력과 자신도 있어요.”
처음엔 부모님은 물론 오빠까지 반대했지만, 결국 내 결정을 존중했다. 우린 1967년 결혼했다. 하나님은 69년에 첫아들을, 71년에 둘째 아들을 주셨다. 두 아들은 시온교회에서 영아세례를 받고 성장했다. 남편은 89년 시온교회 장로가 됐다. 교회에서 아동기를 보낸 사람이 장성해 장로가 된 첫 열매였다. 나는 시온동산에서 한 목사님 등 여러 어르신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고 성장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쓰신다는 믿음을 놓지 않았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