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나라살림에 보탬이 된다면야

입력 2019-12-31 04:02

참 어려운 결단을 했다. 정세균 총리 후보자가 이낙연 총리의 뒤를 이어 문재인정부 후반기 내각을 이끌 2기 총리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의전상 격에 맞지 않는다. 정 후보자는 대한민국 의전 서열 2위인 국회의장을 지냈다. 국무총리가 서열 5위인 점을 감안하면 격이 떨어지는 일이다.

그렇다고 국무총리로서 역할을 하기 쉬운 것도 아니다. 문재인정부도 반환점을 돌았다. 레임덕을 피하기 어려운 시기로 접어들었다. 나라 안팎의 상황이 녹록한 것도 아니다. 어려워질 대로 어려워진 한·중, 한·일 관계에 우방인 미국의 경제적 압박 그리고 세계적인 보호무역의 추세적 흐름까지. 더구나 문재인정부가 마음과 뜻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공들여온 남북 관계까지 어느 하나도 우호적인 여건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른 한편으로는 결과를 가늠할 수 없는 21대 총선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 후보자에게 국무총리직은 도움 되는 것은 없고 위험 부담만 큰 자리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정 후보자를 나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필자로서는 그의 결단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한국 정치계의 원로로서 어떤 일이든 못할 것이 없을 만큼 책임감이 강하다. 2006년 2월 열린우리당의 원내대표 겸 당의장으로 당의 의전 순위 1, 2위를 겸직할 때 집권 후반기 레임덕에 빠져있던 노무현 대통령의 요청에 그 격이 한참 떨어지는 산자부 장관직도 수락해 헌신한 경험이 있다. 이번 총리직 제의도 그런 헌신의 마음으로 수락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려운 나라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야’하며.

사실 정 후보자만큼 국무총리에 적합한 인물도 없다. 첫째, 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 시대의 아픔을 겪으며 일찍부터 나라 발전을 위한 문제의식과 소명 의식을 고민했다. 둘째, 지금은 해체돼 없어졌지만, 굴지의 대기업이던 쌍용그룹에서 임원까지 지내 실물경제 흐름에도 정통하다. 셋째, 1996년 김대중 대통령이 주도한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정치를 시작한 이래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통합민주당, 민주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등 당명은 여러 번 바뀌었으나 일관되게 중도개혁 정당에서 정책위의장, 원내대표, 당의장, 당 대표 등 정당정치의 중심 역할을 잘 감당해왔다. 정 후보자라면 벼랑 끝에 걸린 듯한 작금의 대내외적 상황에서 동북아 정치외교, 경제, 남북문제 등 어려운 국정 현안을 지혜롭게 헤쳐나갈 것이라는 희망을 갖기에 충분하다.

다만 실물경제를 안다고 자부하는 필자로서 몇 가지 당부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경제사회적인 관점에서 세계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중이고, 그 흐름은 두 개의 뉴노멀로 집약할 수 있다. 하나는 탄소(화석)연료에서 수소연료로의 에너지 패러다임 전환이고, 또 하나는 굴뚝 및 오프라인 산업에서 4차 산업으로의 산업 패러다임 전환이다. 이것은 단순한 경쟁 심화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의 경제 체제 자체가 근간부터 무너져 버릴 수 있는 거대한 시대적 변화다.

정 후보자는 이 같은 거대 패러다임 변화의 관점에서 조선, 자동차, 철강을 비롯한 전통적인 제조산업의 구조조정뿐 아니라 탈원전, 노동 개혁, 소득주도성장 등 문재인정부의 기존 핵심정책을 다시 살펴보고 재검토하여, 필요하다면 담대한 수정도 단행해야 한다. 현 정부의 정책이 이런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시장경제의 흐름을 교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면밀히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소기의 정책목표에 오히려 반하는 결과를 초래해 서민과 중산층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더 살펴야 한다.

정 후보자가 정치를 시작한 것은 김대중정부 시절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인의 덕목으로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말했다. 정 후보자의 경력은 바로 그 덕목에 가장 잘 맞닿아 있다. 아무쪼록 그 문제의식과 현실감각을 바탕으로 문재인정부 2기 내각을 잘 이끌어주길 바란다.

이계안 2.1지속가능재단 설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