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사모아는 지금 홍역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한 달 남짓한 사이 홍역 환자 4000명이 발생했는데, 전체 인구(20만명)의 2%에 달한다. 이달 초에만 50여명이 사망했다. 대부분 면역력이 약한 6세 미만 영유아들이다. 사모아 정부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 홍역 백신 접종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급성 유행성 전염병인 홍역이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홍역으로 14만명 넘게 목숨을 잃었다. 전년도보다 12.6%나 늘었다. 사모아뿐만 아니라 민주콩고, 라이베리아, 마다가스카르, 소말리아 같은 가난한 나라들도 홍역 때문에 비상이다. 선진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홍역 발생 신고 건수가 2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영국과 체코, 그리스, 영국 등은 ‘홍역 퇴치국’ 지위를 잃었다.
홍역은 쉽게 예방할 수 있다. 홍역균이 포함된 백신을 두 번만 접종하면 된다. 최근의 홍역 창궐 현상은 백신 접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왜 백신 접종이 잘 안 되는 것일까.
최근 미국의 다트머스대 연구진이 관련 연구 결과를 내놨다. 이른바 히스테리시스(Hysteresis·이력 현상)가 예방 접종률을 떨어뜨리는 주된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히스테리시스는 어떤 물질이 거쳐 온 과거의 이력이 지금의 상태에도 계속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말한다. 물리학에서 주로 쓰는 용어다. 찌그러진 알루미늄 캔이 원래 상태로 복구되지 못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백신 예방접종에서 히스테리시스 효과는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사람들이 백신의 안전성이나 효과에 한 번 의심을 품게 되면 그런 부정적 인식을 떨쳐내도록 설득하는 게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의심이 편견으로 고착화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들어 유럽을 중심으로 ‘안티 백신’운동 같은 백신접종 기피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백신과 관련된 ‘가짜뉴스’가 퍼지면서 백신에 대한 공포감을 더하고 있다. ‘백신 주사를 맞으면 자폐증을 유발한다’ 같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된 정보가 대표적이다.
다트머스대 연구진은 “히스테리시스는 사회적 차원에서 차단하기 어려운 아주 강한 힘”이라고 했다. 한 번 주입된 의심과 편견을 버리는 게 좀처럼 쉽지 않다는 얘기다. 나아가 공동체 속에서 비뚤게 형성된 부정적 인식을 없애는데 쓰이는 사회적 비용도 만만찮을 것이다.
히스테리시스 용어는 경제학에서도 쓰인다. 특정한 경제 사건이 그 이후에도 계속 경제에 영향을 미칠 때 종종 인용된다. 한국의 성장률은 1990년대 초까지 7~8%대였다가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3~4%대로 추락했다. 이후 그 이전의 성장률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윤덕룡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한 기고에서 “저성장 고착화에 따른 우리 경제의 히스테리시스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과연 경제뿐일까. 세밑의 대한민국을 돌아보면 ‘안티 백신’운동 같은 장면이 오버랩된다. 저마다 의심은 많고, 설득은 안되는 형국이다. 의심은 불신을 낳고 불신은 대립과 갈등으로 비화한다. 설득이 안되니 자기 주장만 차고 넘친다. 청와대 앞과 국회 안팎, 광화문에서 연일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렇게 한 해가 저물고 있다.
홍역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보면, 전염병 예방엔 ‘집단면역’이 중요하다. 집단면역이란 집단의 대부분이 감염병에 대한 면역력을 가진 상태다. 이 경우 감염원이 유입되더라도 대부분 감염되지 않는다. 보건 전문가들은 백신 예방접종이 집단면역을 키우는 최선책이라고 강조한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집단면역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 같다. 보듬고 아우르고 추스르는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 원상복구가 안되는 찌그러진 깡통 같다. 그래도 새해가 오지 않는가. 대한민국의 ‘희망 백신’을 고대한다.
박재찬 경제부 차장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