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며칠 안 남겨놓아서인지 요 며칠간 멍한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올해의 마지막 토요일이 되었고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조촐하게 연말 분위기를 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번 연말은 최대한 조용하고 소박하게 보낼 생각이었다. 문득 떠오른 것은 ‘뱅쇼’였다. 작년 이맘때는 친구들과 함께 뱅쇼를 사 먹었지만 이번에는 직접 만들어 먹기로 했다. 저녁시간에 남편과 함께 마트에 가서 와인과 과일, 그리고 시나몬 가루를 사왔다. 베이킹소다를 푼 물에 레몬과 귤을 담가두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뱅쇼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레몬과 귤을 얇게 썰었다. 냄비에 얇게 썬 과일과 설탕을 넣고 와인 한 병을 모두 쏟아부은 다음 불에 올렸다. 중불에 20분쯤 끓이자 집안에 포도향이 가득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바나나를 썰어 냄비에 집어넣었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아니 왜 뱅쇼에 바나나를 넣어?” 나는 바나나를 냄비에서 건지려고 했지만 이미 뜨거운 와인에 녹아든 상태였다. 남편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넣으면 안 돼? 안 될 건 없잖아.” 그러고 보니 시나몬 가루를 넣는 것도 잊어버렸다. 나는 불을 끈 다음 냄비에 시나몬 가루를 넣었는데 실수로 너무 많이 넣는 바람에 코끝이 간지러웠다. 나는 재채기를 하며 뱅쇼를 국자로 휘저었다. 어쨌거나 뱅쇼는 완성되었다.
찬장을 열자 와인잔이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남편에게 와인잔 하나를 못 봤느냐고 묻자 지난달에 깨져서 버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와인잔 하나와 맥주잔 하나에 뱅쇼를 담아 식탁에 올려놓고 마주앉았다. 한 모금 맛본 뱅쇼는 생각보다 맛있었다. 바나나 덕분에 달콤한 맛이 더해져 더 맛있는 것 같았다. 나는 SNS에 사진을 찍어 올리려고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이 뱅쇼는 굳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였다. 시큼하고 달큰한 뱅쇼의 향기 속에서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뱅쇼 한 잔에 묵은 근심을 녹이고 잔을 맞부딪치며 아직은 오지 않은, 다가올 한 해를 위한 건배를 했다. 2019년의 남은 며칠간은 뱅쇼의 향에 취해 흘려보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정해진 뱅쇼 레시피가 없는 것처럼 시간을 보내는 데도 정답은 없으니까.
김의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