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모멘텀” “솔직한 대화” “허심탄회한 대화”.
지난 23일부터 1박2일간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회담에 대한 청와대의 요약은 “대화로 현안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시 주석과는 북·미 비핵화 협상과 사드 배치 갈등, 아베 총리와는 강제징용과 수출규제 등 예민한 현안을 논의했고, 그 문제들은 정상회담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어쨌든 결론은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의 회담에서 “이번 만남이 양국 국민에게 대화를 통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란다”고 했다. 시 주석과의 회담에서도 북·미 비핵화 협상과 관련해 ‘대화 모멘텀’을 이어가도록 협력하자고 뜻을 모았다.
사실 ‘정상회담’ 자체가 정상 간 대화다. 정상회담의 결론이 ‘대화로 해결하자’였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허무한 동어반복이고, 비판적으로 보자면 “별 성과가 없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최악의 갈등 관계에 있는 한·일 정상, 긴장이 여전한 한·중 정상이 만나 ‘대화 해결’에 뜻을 모은 대화 자체가 ‘진전’일 수 있는 점에 대해 기자도 동의한다. ‘대화로 해결하자’는 대화조차 중요하다.
외교에 관해선 문 대통령은 철저히 ‘대화주의자’다. 4강 외교는 말할 것도 없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도 끈질기게 대화의 손을 내밀고 있다.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온갖 도발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중이다. 문 대통령 개인을 향해서도 ‘남조선 당국자’로 지칭하며 입에 담기 민망한 인신공격을 퍼붓고 있다. 그래도 문 대통령은 ‘대화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북·미의 대화를 이어주는 ‘중재자’ ‘촉진자’ 역할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문 대통령의 ‘대화 기조’가 국내 정치에서는 아예 멈추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23일 시 주석, 아베 총리와의 정상회담차 출국하는 서울공항에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예산부수법안 등 민생법안 처리를 당부했다. 말이 당부이지,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으로서는 ‘도발’로 보일 만한 지시였다. 국회는 한국당을 제외한 새해 예산안 처리 이후 사실상 전쟁 중인 상황이다. 문 대통령의 ‘당부’ 이후에도 민생법안은 통과되지 않았다. 오히려 의원들이 국회에서 기저귀를 차고 필리버스터를 하고 온갖 말폭탄을 쏟아내고 있다. 동료 의원의 발언 도중 엎드려 자는 코미디가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국회가 전쟁 중인데, 대통령이 여당 대표에게 법안 처리를 당부하는 것은 한국당에는 “싸우자”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런 당부로는 문 대통령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문 대통령에게 한국당 황교안 대표와의 대화가 아베 총리나 시 주석, 김 위원장을 만나는 것만큼 껄끄럽고 부담스러울 수 있다. 정치 입문 채 1년도 되지 않은 황 대표가 삭발, 단식, 장외투쟁 등 오로지 정부의 발목만 잡으려 한다는 비판은 보수 진영 내부에서도 나온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10일 여야 5당 대표와 만찬 회동을 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황 대표가 선거제 패스트트랙 문제로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와 언성을 높이며 말싸움을 벌였고, 문 대통령이 두 사람을 진정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은 야당 대표를 만나는 것에 열려 있다. 다만 다당제 현실에서 ‘영수회담’ 같은 형식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현안이 별로 없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래도 길은 대화밖에 없다. 문 대통령이 아베 총리를 만나서 말한 것처럼 “국민에게 대화를 통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문 대통령은 26일 기고 전문매체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기고문에서도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대화와 행동이 계속되면 서로를 더 필요로 하게 되고 결국 평화가 올 것이라 확신한다”고 했다. 국내 정치도 마찬가지다. 국회가 대화를 통해 ‘평화’까지는 못 가더라도 ‘공존’하는 정도만 돼도 세밑이 이렇게 뒤숭숭하진 않을 것 같다.
임성수 정치부 차장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