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배승민] 물건과 나

입력 2019-12-27 04:07

구두 장인들은 구두 뒤축만 슬쩍 봐도 신은 사람의 체형, 습관은 물론 직업과 성격까지 알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비싼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종일 자신의 몸을 지탱해주는 고마운 물건을 관리하는 데 들이는 정성과 습관을 보면 결국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구두를 만지는 직종에 있거나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내 신발을 보면 과연 어떻게 볼까 싶어 민망해질 때가 종종 있다. 한 번 사면 아끼고 아껴 애지중지 잘 관리하는 어르신들에 비해 단지 바쁘다는 핑계로 물건 관리를 참으로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 가게에서 계산대 옆에 누군가가 두고 간 지갑을 발견한 일이 있었다. 나 외에는 남아 있는 손님이 없었고, 생각보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다보니 과연 저 지갑의 주인은 누구일까 하고 시작된 공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색이 곱고 고급스러운 모양으로 보아 젊은 아가씨가 주인일 듯했다. 색의 바랜 정도로 보았을 때 물건을 하나 사면 오래도록 아껴 사용하는 성향일 것 같고, 지갑을 열어놓은 채로 떠난 것은, 계산하다가 급한 일이 생겨 그만 지갑의 존재마저 잊어버리고 자리를 뜬 상황이지 않았을까. 지갑처럼 소중한 것을 두고 자리를 뜰 만큼의 사연은 과연 무엇일까? 열린 틈 사이로 현금뿐 아니라 쿠폰으로 보이는 종이류 등이 꽉 차 있는 것을 보니 단골 가게가 많거나 관심사가 많은 사람 같다, 하며 실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계산을 하며 가게 주인에게 지갑의 존재를 알려주었더니 아마 앞손님이 두고 간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가 단골인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지만 상상은 상상으로 맡기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더 물어보지 않았다. 분명 나의 상상은 어설픈 짐작일 테니까. 연보라색 귀여운 지갑의 주인은 건장한 체격의 성격 급한 청년일지도 모른다. 포장된 음식을 들고 나오며, 내 지갑이나 구두에서 엿보이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성들여 잘 관리하는 야무진 사람까지는 아니겠지만, 아무렇게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으로 비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배승민 의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