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맨쇼’ 필리버스터 희화화 된 한국 정치

입력 2019-12-25 18:43
성탄절에도 공직선거법 개정안에 관한 여야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가 이어졌다. 2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언하고 있다. 의원들이 지역구 등으로 간 탓에 자리가 많이 비어 있다. 선거법 관련 필리버스터는 이날 자정에 자동 종료됐지만 향후 검찰 개혁 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가 이어질 전망이다. 최종학 선임기자

3년 만에 국회에서 재연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에 국민들의 불만이 증폭되고 있다. 필리버스터는 의회에서 소수파가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25일까지 사흘째 이어진 필리버스터는 여야의 극한 대립만 부각돼 국민들에게 피로감을 주고 있다. 발언 내용도 부실하고, 태도도 엉망이어서 정치를 희화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6년 2월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더불어민주당의 필리버스터에는 많은 사람이 열광했다. 당시 필리버스터를 생중계한 국회방송은 ‘마국텔’(마이 국회 텔레비전)이라고 불리며 개국 이래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고,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민주당과 정의당의 지지율은 급등했다.

하지만 이번 필리버스터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냉랭하다. 일단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정국을 거치면서 국민 피로도가 극에 달했다는 지적이 많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여야가 계속 갈등만 하면서 원내에서 이뤄지는 정치가 거의 없었다”며 “이번 필리버스터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 하나로만 여겨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4월 말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검찰 개혁 법안이 패스트트랙에 오른 뒤 여야는 8개월 동안 극한 대치를 이어왔다.

이번 필리버스터는 동료 의원들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반대 의견에 대한 존중과 경청의 자세는 전혀 찾기 어렵다. 민주당 의원이 단상에 서면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우르르 본회의장을 나가고, 한국당 의원이 발언하면 민주당 의원들은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보거나 잡담하는 식이다. 조는 것을 넘어 책상에 엎드려 자는 의원들도 있다.

그래서 이번 필리버스터가 정치를 더욱 우습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초반부터 원색적인 막말과 억지 주장으로 얼룩졌다. 권성동 한국당 의원은 문희상 국회의장을 ‘문희상씨’라고 불렀고, 선거법 개정안을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 누더기, 걸레’로 폄하했다. 한선교 한국당 의원이 최인호 민주당 의원에게 반말로 “할 말 없으면 들어가라”고 외치자 최 의원이 “한 번 해볼까요. 저랑 친한 사이냐”고 반격하는 등 고성이 오간 건 예사다.

정치권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 의원은 “의석은 텅 비었는데 단상에서 몇 시간 동안 열변을 토하는 것을 보니 ‘원맨쇼’와 다를 게 없어 씁쓸했다”며 “국회가 품격과 권위를 점점 더 스스로 갉아먹고 있다”고 말했다.

필리버스터는 소수파 정치 세력의 최후 보루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의 필리버스터도 곧 소수파의 저항의 역사다. 한국에서 최초로 필리버스터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군사정권 때인 1964년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준연 의원 체포동의안을 막기 위해 5시간19분간 발언을 이어갔고 결과적으로 체포동의안은 부결됐다.

소모적 공방으로 일관하는 이번 필리버스터는 다음 달 중순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초단기 임시국회를 열어 패스트트랙 법안을 처리하겠다는 여당 전략대로라면 7번의 임시국회가 열려야 하고, 내내 필리버스터가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 총선에서 정치권을 심판하겠다는 목소리도 거세질 전망이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여야가 몇 달 동안 끌어온 주제에 대해 또 필리버스터를 하고, 선거법 개정안도 원안에서 크게 후퇴하다 보니 국민의 실망감만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재희 박재현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