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완주] 내 믿음을 지키며 달려갈 길 마치는 날, 완주자 노래를 부르리

입력 2019-12-27 19:17 수정 2019-12-27 19:40
픽사베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라고 말했던 바울처럼 이 땅에서 ‘완주자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따라서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는가”란 질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과 같다. 누구나 모태에서 태어날 때는 울음으로 인생을 시작하지만, 세상을 떠나는 모습은 개인마다 다르다. 저마다 고유한 삶을 살듯 죽을 때도 각자 고유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과 친해지는 것은 평생에 걸친 영적 과제다. 한 번뿐인 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는 죽음도 그 사람만의 가치 있는 경험으로 완성해야 한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미증유의 삶 속에서 말씀대로 살면서 죽음에 이르는 것이 신앙적 삶의 완주다.

은하수로 춤추러 가는 날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가슴속 이야기에 귀 기울여 온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는 인간에게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죽음을 두려움 속에서 맞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죽음은 성장의 마지막 단계’라고 말했다. 그는 ‘인생수업’에서 우리가 아직 죽지 않은 이유는 ‘아직 삶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기간 동안 우리 모두에게 배워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사람들은 많은 배움을 얻지만 대개 그때는 배움을 실천하기에 너무 늦습니다. 내가 죽지 않은 것은 삶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얻는 배움이란 미완성의 일들을 완성한다는 뜻입니다. 미완성의 일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관한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인생의 주제로 삼은 연구자답게 그의 장례식은 독특했다. 그는 평소 ‘생애 마지막 날은 은하수로 춤추러 가는 날’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2004년 8월 24일 78세를 끝으로 하늘나라로 간 그녀를 보내는 고별식에는 흑인성가대가 부르는 성가곡으로 분위기가 고조됐다. 의식의 절정은 그녀의 두 자녀가 관 앞에서 작은 상자를 열었을 때였다. 상자 안에서 한 마리의 호랑나비가 날아올랐다. 동시에 참석자들은 미리 받은 종이봉투에서 일제히 수많은 나비를 파란 하늘로 날아 올렸다. 그가 가진 사상의 상징이었던 나비가 공중으로 날아가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가 드디어 번데기에서 부화해 나비가 돼 죽음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음을.

죽음을 앞둔 다윗의 기도

성경이 말하는 아름다운 삶의 완주는 어떤 것일까. 성경에 죽음을 앞둔 다윗이 솔로몬에게 당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1~3) 이 땅에서 자녀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당부가 신앙의 유훈이 돼야겠다.

렘브란트의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야곱’. 요셉이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야곱에게 데려가 축복기도를 받는 모습이다. 야곱은 나이가 많이 들어 앞을 볼 수 없었지만, 마음을 다해 손자들에게 축복기도를 해준다.(창 48:1~22) 독일 드레스덴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던질 수 있는 참된 질문은 “내가 지금까지 이룬 성취나 영향력이 무엇인가”가 아니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내가 죽은 후에도 주변 사람들이 계속 열매를 맺도록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바울에겐 생명보다 소중히 여긴 사명이 있었다. 그것이 죽음 앞에서도 그를 담대하게 만들었고 아름다운 삶의 완주로 이끌었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밀레도에서 만난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바울은 또 이런 말을 남긴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라고 말했다.

최고의 행복 ‘블리스(Bliss)’

인간이 느끼는 최고의 행복을 블리스(Bliss)라고 한다. 이는 더없는 기쁨, 천상의 기쁨, 지복(至福), 천복(天福)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다. 블리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심은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한 무지함 때문이라며 죽음 이후 우리의 존재가 영원히 죽지 않고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두려움은 해소될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을 수용한 뒤 느끼는 평온한 마음과 감사가 바로 블리스다.

암병동 환자들이 느끼는 ‘행복의 농도’가 가장 짙다고 한다. 죽음을 예견하고 살기 때문에 매 순간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또 혹여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에 진심으로 미소짓고 마음을 다해 대화한다. 인생의 아름다운 완주란 무엇일까. 그것은 이 땅을 떠날 때 사람들과 감정적인 화해를 하고 관계를 회복한 후 ‘세이 굿바이(say goodbye)’ 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 “3일 후 당신이 죽는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물을 때 하고 싶은 대답, 지금 그 일을 하면 행복할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임종을 앞둔 이들에게 생전에 하지 못해 후회되는 말은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합니다”라고 한다. 특이한 것은 용서받지 못한 것보다 용서하지 못한 것을 더 후회한다고 한다. 일상에서 용서하고 화해하며 사랑하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세다. 지난 삶을 돌아보고 의미를 찾는 삶의 정리가 필요하다. 흘러간 시간들이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바른 결정과 선택으로 이루어진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발견하는 과정, 이 시간은 죽음을 앞두고 찾아오는 인생의 허무를 넘어 심리적 안정감을 선물한다.

헨리 나우웬은 ‘죽음, 가장 큰 선물’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열매라고 말한다. “늙고 약해질수록 점점 더 일을 못 하게 될 것입니다. 내 몸과 정신은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령께서 나의 연약함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시고 그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이셔서 형편없이 쇠락해 가는 내 몸과 정신에서 열매를 맺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은 참으로 새로운 출생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다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이 존재할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 주변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 애틋해진다. 사물에 대한 시선이 더 예민해진다. 습관적으로 해오던 기도가 좀 더 새롭고 간절해진다. 삶의 아름다운 완주는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 일상의 삶이 나의 죽음 이후, 내가 누구였는지 말해준다.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