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는 생명을 살리고, 가난을 끝장내고, 여성의 힘을 키우는 “가장 혁신적인 방법”이 등장한다. 바로 피임약 보급이다. 별것 아닌 아이디어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현재 지구촌에서 피임약이 필요한데도 약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인구가 2억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난한 여성들이 피임약을 쉽게 구하게 되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자신의 교육 수준을 높이고, 돈을 벌고,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된다. 아이 양육에 필요한 음식과 보살핌, 그리고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시간적, 금전적 여유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과거 50년 동안 피임약 사용을 확대하지 않고 가난에서 탈피한 나라는 하나도 없다.”
이런 주장을 내놓는 멜린다 게이츠(55)는 세계 최고 부자이자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64)의 아내다. ‘누구도 멈출 수 없다’는 멜린다가 처음으로 펴낸 에세이다. 그는 남편과 함께 2000년 세계 최대 자선단체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설립했는데, 책에는 멜린다가 마주한 가난한 이들의 곡진한 사연과 반짝이는 깨달음의 순간이 한가득 담겨 있다. 핵심은 부제인 ‘여성의 삶이 달라져야 세상이 바뀐다’는 문장으로 갈음할 수 있다. 그는 “여성이 하나로 조직화되면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날아오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주목할 만한 에피소드가 수두룩한데, 그중 하나는 에이즈 예방을 위해 그가 인도에서 벌인 활동이다. 멜린다는 성 노동자한테 콘돔 사용을 권장하면서 성병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우려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콘돔에 대해서라면 우리가 당신들을 가르쳐도 될 거예요. 그보다도 우린 폭력을 막을 힘이 필요해요.”
문제는 콘돔 사용을 권하면 주먹부터 휘두르는 남자들, 콘돔을 소지한 것이 발각되면 폭력을 행사하는 경찰이었다. 멜린다는 콘돔 사용을 권하는 성 노동자가 공격을 당하면 일단 전화로 암호를 누르게 하고, 그러면 12~15명의 여성이 경찰서로 달려가 항의를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면서 다른 지역에 사는 성 노동자들도 합류했다. 이 프로그램은 순식간에 인도 전역에 보급됐다. “우리는 HIV 예방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효과적이고 침투력이 좋은 것을 발견해냈다. 여성들이 뭉치고, 자기 목소리를 찾고,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의 힘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멜린다의 태도다. 연민과 동정을 넘어 가난한 이들과 어깨를 걸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책장 곳곳에 진하게 묻어난다. 남편인 빌은 추천사에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이 책은 정말 뛰어난 책이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적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