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숙 (4) 전학 간 학교서 68점 받자 서울아이들 대놓고 비아냥

입력 2019-12-27 00:02
부산에서의 피란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정착하면서 가족 모임 때마다 예배를 드렸다. 어머니(왼쪽)가 아버지(왼쪽 두번째) 등 온 가족 앞에서 예배를 이끄는 모습.

나는 전쟁으로 초등학교 2학년과 3학년 1학기 과정을 잃었다. 1학년 과정을 마칠 무렵 피란길에 올랐는데, 부산에서 다시 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3학년 2학기 무렵이었다. 그곳 친구들은 분명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는데도 나와 너무 달랐다. 특히 억양과 사용하는 단어가 달랐다. 그럼에도 몇 달 만에 부산 토박이처럼 사투리로 친구들과 소통하며 친해졌다. 그런 나를 보고 가족은 신기해했다.

뭐든 열심히 했고 잘하려 애썼다. 3학년 과정을 마치고 4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부반장에 선출됐다. 학교생활이 즐겁고 안정될 무렵, 어머니는 전학을 가야 한다고 했다.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부산으로 피란 온 아이들을 위해 서울 학교의 분교가 세워졌단다. 나와 동생들은 분교로 전학 갔다. 서울 학교의 분교는 천막 학교였다.

짧지만 우정을 쌓으며 즐거웠던 부산 친구들과 헤어지고 5학년 교실로 들어갔다. 나는 전학 간 첫날 경험을 평생 잊지 못할 아픈 기억으로 갖고 있다. 천막 교실에서 만난 친구들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새 친구를 만날 때 갖는 호기심이나 배려, 친절의 눈빛은 없었다. 부산 아이들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 당혹스러웠다. 같은 한국 아이들인데 완전 다르게 느껴졌다. 담임교사가 나를 소개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다 기억나진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이전 학교의 부반장이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일제고사를 치렀다. 시험지를 받아본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배운 적이 없는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그 시험에서 68점을 받았다. 그런 점수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절망스러웠다. 당찬 서울 아이들은 “쟤가 부반장이었대”라며 대놓고 무시했다.

나와 똑같이 아동기를 겪는 아이들이 어떻게 친구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었겠나. 내가 누구고, 어떤 환경에 태어났으며 얼마나 사랑받고 존중받으며 살았는지…. 전쟁으로 모든 걸 빼앗긴 채 한반도 끝자락까지 쫓겨온 서럽고 아픈 아이라는 걸 친구들은 알 수 없었으리라.

전쟁 전에 월남해 서울에서 살던 외삼촌들이 수소문해 우리 가족을 찾아냈다. 일가친척을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외할아버지가 납치당해 생사도 알 수 없다는 슬픈 소식을 접했다. 우리 가족은 전쟁으로 고향과 재산, 집뿐 아니라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를 다 잃었다.

외삼촌들은 잔뜩 기죽은 조카들을 격려해주고 희망과 꿈을 심어줬다. 머잖아 서울에 가면 멋진 것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했다. 삼촌들이 사는 서울 집엔 농구 배구 등 재미난 운동을 할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다고 했다. 길도 엄청 넓어서 자동차가 두 대씩 오간다고 했다. 4차선 도로가 있다고 알려준 것이다. 서울은 건물과 거리도 번화하고 아름답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서울을 꿈꿨다.

부산 집 뒤쪽에 작은 동산이 있었다. 숙제하거나 조용히 혼자 있고 싶을 때면 그곳에 올라가 나무 밑 그늘진 곳에 숨곤 했다. 침대처럼 넓고 평평한 바위에 앉아 바람을 느끼고, 하늘을 쳐다보며 상상의 날개를 폈다. 나만의 비밀 장소였다. 거기 있으면 혼자가 아니란 느낌이 들어 소원을 아뢰곤 했다.

“서울은 멋진 곳이라는데 나도 거기서 살고 싶어요. 일가친척 모두 다시 만나 함께 살게 해 주세요.” 간절한 기도는 응답을 받았다. 우리 가족은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나는 결국 서울 중구 장충초등학교로 전학해 거기서 졸업장을 받았다.

북한에서 입학한 첫 번째 초등학교, 부산에 피란 내려와 들어갔던 부산초등학교, 세 번째 학교인 천막 학교, 마지막으로 장충초등학교. 파란만장한 초등학교 시절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