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5시∼저녁 9시’ 강제로 일했는데… 노동청은 “품앗이”

입력 2019-12-25 04:01
지난 17일 전남 곡성에 있는 지적장애 여성 A씨 집에 A씨가 윤모씨 논밭에서 일할 때 입던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옷에 묻어 있는 검은 얼룩은 토란 줄기에서 나온 진액이다.

지적장애가 있는 60대 여성이 전남 곡성의 한 마을에서 이웃에 사는 80대 남성의 강요로 17년 동안 ‘공짜 노동’을 하다 관련 기관에 구출됐다. 60대 여성 A씨는 길게는 하루 12시간씩 이웃 남성 윤모씨의 농사일과 각종 밭일을 하고도 대가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전남장애인권익옹호기관은 A씨 사건을 접수해 지난 1월 광주지방고용노동청에 수사를 의뢰했지만 노동청은 노동력 착취가 아닌 ‘품앗이’라고 결론냈다. 노동청은 “갸는 그 집 노예였다”는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도 윤씨와 친척이거나 금전 관계가 있는 마을 주민 2명의 말을 듣고 이같이 판단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관은 지난 23일 노동청에 재수사를 의뢰하는 고발장을 냈다.

곡성을 떠나 다른 지역의 친척집에 머물고 있는 A씨는 지난 20일 국민일보와 만나 “아픈 남편(지적장애 2급)을 두고 그 집에서 머슴같이 일했다. 그래도 나는 다시 고향에 가고 싶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윤씨는 A씨를 성폭행하고 성추행한 혐의로도 기소돼 재판받고 있다. 국민일보는 마을 주민들과 수사 담당자 등을 만나 A씨의 17년을 따라가봤다.

A씨의 공짜 노동이 시작된 건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A씨와 함께 살던 시어머니가 사망하고 A씨 부부만 남자 윤씨가 본격적으로 접근했다는 게 마을 주민들의 전언이다. 지난해 9월 떨어져 살던 A씨 가족들이 피해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17년 동안 A씨는 윤씨에게 얽매인 삶을 살았다.

지난 17일 곡성의 마을회관에서 만난 주민들은 A씨 이름을 꺼내자마자 “할배네집 노예”라고 했다. A씨 옆집에 사는 한 주민은 “농번기에는 윤씨가 새벽 5~6시면 A씨 집 앞에 오토바이를 타고 와 그를 데려갔다가 밤 9시가 넘어 돌려보냈다”며 “9월 토란 수확이 끝나면 A씨는 윤씨 집에서 밤늦게까지 토란 말리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도 “A씨는 마을회관에서 쉬다가도 윤씨가 와서 ‘일하러 가자’고 하면 한숨을 쉬며 따라나섰다”며 “부부가 모두 지적장애가 있어 싫어도 싫다는 말을 못하고 하라는 대로 했다”고 기억했다. 누가 봐도 A씨와 윤씨 사이에 상하 관계가 뚜렷했다는 것이다.

A씨 집을 찾아 옷장을 여니 찐득한 액체가 묻은 흙색 옷가지가 쏟아져 나왔다. 토란 줄기에서 나온 진액이었다. 이 모습을 본 주민들은 “밤새 검은 진액을 뒤집어쓰고 남의 집에서 일하는 게 품앗이예요? 노예지”라고 혀를 찼다.

기관이 노동청에 낸 고발장에도 이런 증언이 고스란히 담겼다. “A씨는 한마디로 노예여요. 일당도 하나도 안 주고 그랬다요” “우리들 말은 생전 안 들어요. 그 아저씨 말만 듣고” 등의 내용이다. 농사일이 없을 때는 A씨가 근처 식당에서 일하며 일당을 받았는데, 윤씨는 농약값 등의 명목으로 많게는 30만원씩 가져갔다고 한다. A씨는 윤씨가 갖고 있던 본인 통장을 최근에야 돌려받았다.

대문 앞에 여기저기 널려 있는 농업용 쓰레기들. 윤씨는 농약값 등을 이유로 A씨에게 지속적으로 돈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씨는 노동청 조사에서 “내가 A씨네 농사일을 다 해줬고 A씨도 그 대가로 나를 도와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청도 윤씨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품앗이로 결론냈다. 그러나 노동청 조사 자료 등을 보면 윤씨는 논 4000평과 밭 400평을 부인과 함께 경작했다.

A씨는 이곳에서 벼와 토란, 고추, 참깨, 고구마, 매실, 감, 곶감 작업을 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반해 A씨의 경작 규모는 논 1400평, 밭 600평가량으로 윤씨 경작지의 절반 수준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누가 품앗이라고 하느냐”고 반문했다.

노동청은 마을 주민 2명을 참고인으로 조사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윤씨에게 유리한 진술을 했다. 취재 결과 이들 중 한 명은 윤씨와 친척이었고, 다른 한 명은 돈 거래가 얽힌 사람이었다.

사건을 맡았던 근로감독관은 24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마을 주민들을 만나 경작 규모와 품앗이 여부를 조사했다”며 “피해자가 윤씨와 대질신문을 거부해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기관은 근로감독관의 주장에 대해 “성폭행 가해자와 피해자를 한자리에 불러 대면조사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혀를 찼다.


기관은 노동청 조사가 허술했다고 보고 재수사를 요구하는 항고장을 제출한 상태다. 이소아 변호사는 “지적장애가 있는 여성의 강제노동을 품앗이로 단정한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장애인복지법 위반 여부 등을 고려해 다시 수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제 노동에 성까지 착취”

윤씨는 강제노동과 별개로 성폭행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의 공소장에 따르면 윤씨는 지난해 자신의 집과 A씨 집, 고추밭에서 A씨를 추행하고 성폭행했다. 다만 A씨가 성폭행당한 시기를 정확하게 특정하지 못해 지난 한 해 있었던 4건에 대해서만 기소가 이뤄졌다.

이정민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 변호사는 “수사기관이 성폭력 사건을 조사할 때 피해자에게 세부 내용을 캐묻지 않는 개방형 질문을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지적장애가 있는 여성의 경우 다른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A씨가 벼나 토란처럼 재배 시기가 명확한 작물을 농사지은 만큼 어느 밭에서 일할 때 윤씨가 어떤 행위를 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조사했다면 공소사실이 더 많았을 거란 얘기다.

지난 18일 광주지법에서 열린 4차 공판에서 윤씨 변호인은 “윤씨가 간음을 시도할 신체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성폭행 피해 신고가 경찰에 접수된 이후 윤씨가 음독을 시도해 경찰이 출동한 기록이 있는 점, 윤씨가 동네 어른들에게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시인한 적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신체 감정은 필요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윤씨 변호인은 “재판이 진행 중이어서 입장을 밝히기 곤란하다”고 말했다.

A씨는 현재 머무는 친척집에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A씨 가족들은 곡성의 집과 논밭을 처분하고 새 보금자리를 찾고 있다.

곡성=글·사진 황윤태 기자 trul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