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여건 개선이라는 ‘봄바람’을 타고 원화 가치가 오르고 있다. 지난 8월 1200원 선을 돌파했던 원·달러 환율은 등락을 거듭하다 이달 들어 1160원 선까지 떨어졌다. 무역전쟁을 벌이던 미국과 중국이 1단계 합의에 이른 데다 노딜 브렉시트(영국의 조건없는 유럽연합 탈퇴) 우려가 잦아든 게 출발선이다. 전문가들은 내년 상반기까지 원화 가치 상승(환율 하락) 흐름이 이어진다고 관측한다.
하지만 과도한 원화 가치 상승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원화 가치 상승은 수출경쟁력을 낮추는 데다 물가 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수출 부진, 저물가에 시달리는 한국 경제의 성장을 제한하는 ‘불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원·달러 환율은 2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1163.9원에 거래를 마쳤다. 전 거래일보다 0.4원 떨어졌다. 환율은 지난 4일만 하더라도 1194.3원으로 1200원 선에 근접했다. 그러다 지난 13일(1171.1원) 하루 사이 15.1원이나 내려간 뒤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다.
원화 가치 상승을 이끈 원동력은 ‘옅어진 불확실성’이다. 불확실성 완화 흐름 속에 위험자산으로 분류되는 원화 수요가 늘면서 원화 가치 상승으로 이어진 것이다. 세계 1·2위 경제대국인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해빙 무드’로 접어들자 내년 경기 회복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영국 보수당이 지난 12일(현지시간)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브렉시트 합의안이 의회 문턱을 넘을 가능성도 높아졌다. 최제민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원은 “미·중 무역합의에 힘입어 연말까지 원·달러 환율이 1150원대로 내려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한 원화 강세 압력은 내년 상반기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인 반도체 경기가 되살아난다는 전망이 우세해서다. 박희찬 미래에셋대우 연구원은 “국내 수출의 성장세를 좌우하는 반도체 업황이 살아나면서 원·달러 환율은 내년 상반기 1120원까지 내려갈 것으로 보인다. 다만 미국의 11월 대선을 전후해 불확실성 변동성 구간이 커지기 때문에 하반기 1170원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도 내년 1분기에 1120원까지 내려갈 수 있다고 봤다.
중국 위안화 강세 흐름도 원화 가치를 떠받치는 요인으로 꼽힌다. 올해 들어 원화는 위안화에 동조화된 움직임을 보이며 출렁거렸다. 한국의 대중(對中) 무역의존도가 높은 데다 위안화 대체 통화로 유동성이 풍부한 원화가 선호되기 때문이다. 김경환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중국은 여전히 대미 수출품에 평균 18%나 되는 관세를 물고 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내년 미국 대선 전에 2단계 합의를 보려고 노력할 것”이라며 “위안화는 달러당 6.6위안까지 내려가 원화 가치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원화 강세가 경기 회복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수출품 가격이 높아져 무역수지가 악화되는 데다 수입품 가격 하락으로 국내 물가 하락 압력이 거세지기 때문이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저물가 기조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원화 가치가 올라가면 디플레이션(장기적인 물가 하락) 압력이 거세져 성장을 제한하게 된다. 특히 반도체 기업들은 임금 등의 비용을 원화로 지불하는 비중이 높은데 이는 주력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고 말했다.
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