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미투(#MeToo)운동의 상징’ 이토 시오리의 울음 섞인 승소 인터뷰를 보면서 눈물이 났다. 이토는 지난 18일 자신을 성폭행한 TBS방송 간부 야마구치 노리유키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이겼다. 2015년 4월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무려 4년8개월 만이다.
두 차례의 만남을 통해 그의 힘든 싸움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승소 소식이 감격적으로 다가왔다. 솔직히 말해서 성폭력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고 피해자만 만신창이가 되는 경우가 많았던 일본에서 그의 승소를 기대하지 않았었다. 이토의 경우에도 이번 판결 이전까지 좋은 결과를 얻은 적이 없었다.
앞서 경찰은 2015년 이토의 신고를 받고 처음엔 사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이다가 이토가 호텔 CCTV 영상 등을 증거로 확보한 뒤에야 마지못해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이후 체포영장을 받고도 야마구치를 놔줬으며, 검찰 역시 질질 끌다 이듬해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법원은 형사 소송을 다시 진행하게 해달라는 이토의 요청을 기각함으로써 야마구치는 아예 처벌을 받을 수 없게 됐다. 답답한 상황에도 이토는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2017년 야마구치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행 사실을 폭로했다. 성폭행 피해조차 제대로 신고하지 못하는 일본의 분위기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어 그는 자신의 경험과 함께 성폭행 피해자를 둘러싼 일본 법률과 사회 인식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 ‘블랙박스’를 출간했다.
외신을 통해 이토의 소식을 알게 된 후 ‘블랙박스’ 출판사를 통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런데 이토가 일본에서 ‘꽃뱀’ ‘위안부’ 등 인신공격성 비난은 물론이고 살해협박까지 당하다가 거주지를 영국 런던으로 옮기는 바람에 스케줄 잡기가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후 이토로부터 지난해 10월 초 서울에서 열린 제3회 국제 탐사저널리즘 아시아 총회에 참석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서울을 찾은 이토를 인터뷰하면서 그가 그동안 보여준 용기 못지않게 투철한 사명감을 지닌 기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우리나라에선 예비기자 시절의 성폭력 사건으로 알려졌지만 현재 그는 능력있는 기자로 자리매김한 상태다. 미국에서 어릴 때부터 유학해 영어 실력이 뛰어난 그는 BBC, 로이터, 알자지라 등 해외 유수 언론과 계약을 맺고 기사를 쓸 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 감독으로도 국제적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일본의 고독사를 다룬 ‘고독한 죽음’은 2018년 뉴욕페스티벌 TV&Film 어워즈에서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총회가 끝난 이후 서울에 남아 성폭력상담지원센터, 위안부 할머니들의 ‘나눔의집’ 등을 방문했다. 당시 대학로나 광화문에서 열리던 페미니즘 커뮤니티의 여성 집회를 직접 보고 싶어 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못 본다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두 달 뒤 다큐멘터리 제작과 관련해 서울에 출장 왔을 때 ‘한국 미투의 상징’인 서지현 검사를 만나기도 했다.
미투 1주년을 맞아 세계 각국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취재하기 위해 일본에 갔을 때 그를 다시 만났다. 일본에서는 몇 달 전 후쿠다 준이치 재무성 사무차관의 TV아사히 여기자 성희롱 파문 이후 잠잠하던 미투운동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TV아사히 여기자는 당시 후쿠다 차관의 성희롱 문제와 관련해 이토와 상담을 한 뒤 폭로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언론사에 종사하는 여기자들이 ‘미디어에서 종사하는 여성 네트워크’를 결성했다. 일본에서는 그동안 여기자들이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체조차 없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첫발이다.
이토의 외로웠던 외침은 일본 사회의 단단한 남녀 차별 문화에 균열을 냈다. 특히 이번 승리로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내는 일본 여성들이 점점 늘면서 균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갈 것이 분명하다. 느리지만 가부장적인 일본 사회도 변하고 있다.
장지영 국제부 차장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