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숙 (3) 8살에 집안살림 도맡자 동네선 “친엄마 맞냐”

입력 2019-12-26 00:08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앞줄 왼쪽 두번째)와 가족들이 1997년 9월 어머니 생신을 맞아 서울에 모인 모습. 어머니(앞줄 가운데)와 5남매가 모두 모였다.

나는 남아선호사상이 일반적이던 시대의 여자아이로 태어났다. 어느 가정이든 아들과 딸을 차별하며 키웠다. 이상할 것도 없고, 분노할 일도 아니었다. 전쟁 직후였고 피난 시절이었다. 생존이 당면 과제였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고향에 두고 왔더라도 당장은 피난민이었고 가난했다.

우리 형제는 위로 오빠가 하나 있고 아래로 여동생 하나, 남동생 둘이다. 오빠는 12살, 나는 8살이었다. 막내 남동생은 돌이 채 되지 않은 아기였다. 피란 통에 셋째가 병에 걸려 부모님은 그 아이를 살리는 일에 매달렸다. 결국 한 살도 안 된 막내는 8살 큰 누나인 내게 맡겨졌다. 추운 겨울에도 아기 옷과 기저귀를 근처 냇가로 가져다 빨았다. 장날이 되면 어머니를 대신해 10리 길을 걸어 장에서 쌀을 사고 찬거리를 샀다. 쌀은 머리에 이고 찬거리는 손에 든 채 다시 시골길을 걸어왔다.

무거운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녀서인지 다섯 형제 중 가장 키가 작고 목도 짧다. 동네 사람들은 냇가에서 빨래하고 장 보러 다니는 작은 여자아이를 보며 사정도 모른 채 “엄마가 너를 낳았니”라고 물었다. 친엄마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아동 학대에 노동 착취라고 문제 될 법한 일이다. 모든 아이가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순응하는 기질인 것 같다. 한 번도 “왜 나만 시켜요. 나도 놀고 싶어요”란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친할아버지는 전쟁 전 북한에서 납치당해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 할머니는 피란 시절 우리 집에 함께 살았다. 온 가족에겐 할머니가 최우선 배려 대상이었다. ‘아동 최상 이익의 원칙’ 같은 아동인권 개념은 꿈도 꾸지 못한 시대다. 할머니 다음엔 아버지, 그다음 오빠, 아픈 남동생, 막내 남동생, 여동생 순이었다. 마지막이 나와 어머니였다. 어린 내가 어머니와 같은 격일 순 없으나 역할에 있어 그랬다.

나는 어머니가 하는 일을 거의 대신해냈다. 어머니가 외출하면 막내를 업고 밥을 짓고 찬거리를 준비했다. 어머니가 오면 곧바로 식구들이 밥 먹을 수 있도록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렇게 했다. 당시 나는 어머니가 죽는 게 가장 두려웠다. 어머니 귀가가 늦어지면 동생을 업고 좌불안석했다. 아이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절대적이라는 생각,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하다. 진리처럼 내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

나는 아동인권 옹호가가 될 기미가 전혀 없는 아이였다. 나의 권리를 느껴본 적도, 주장해 본 적도 전혀 없다. 그런데 아동인권에 대해 슬며시 깨달음을 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된다.

몸이 아주 아프던 셋째가 부모님 기도와 정성으로 살아났다. 지식인이었고 생활력이 강했던 부모님은 미군 부대를 찾아가 ‘마이신’이란 약을 구해와 치료했다. 셋째는 예민했고 언어구사력이 탁월했다. 피란 시절 살던 셋집은 온돌방이지만 난방이 잘 안 되었다. 아랫목에 한 사람 앉을 만큼만 온기가 있었다. 당연히 할머니 자리였다. 긴 병치레를 하고 난 동생은 매일 할머니와 딱 붙어 앉았다. 어느 날 할머니를 빤히 바라보던 동생이 또박또박 말했다. “할머니, 이제 할머니 집으로 가시라요.”

이북에서 피란 온 우리는 어른이고 아이고 이북 사투리를 썼다. 동생이 할머니에게 감히 명령한 것이다. 이 한 마디가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에게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맏며느리인 어머니는 완전 죄인이 됐다.

아이의 맥락을 보면 이건 아동권리선언이다. ‘할머니, 어린 나도 너무 추워요. 따뜻한 자리 독차지하지 말고 공평하게 나눠요.’ 아니면 “할머니 집으로 가시라요.”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