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0일 열린 유엔아동권리협약 채택 30주년 기념 포럼엔 북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북한말로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옮기는 활동을 함께한 탈북 청소년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이런 협약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특히 ‘아동학대’란 단어가 생소했다”고 말해 참석자 모두 놀랐다. 또 “북한 사회는 종교가 없으므로 종교란 단어를 쓸 때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내 신앙의 뿌리는 북한에 있다. 나는 1942년 평안남도 진남포 믿음의 가문 4대손으로 태어났다. ‘평양과 진남포 지역에서 선교하던 광성학교 설립자 홀 선교사의 전도로 개종한 김보안 권사는 큰 포목점을 운영하면서 진남포 중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1913년 김 권사가 벽돌 건물의 예배당을 봉헌했다. 그 기념으로 교회마당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어릴 때 어머니에게 늘 듣던 이야기다. 1913년 벽돌 건물의 예배당을 봉헌한 김보안 권사는 어머니의 할머니이자 내 증조할머니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신앙을 유산으로 받아 나와 우리 형제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당시 감리교는 북한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교단이었다. 할머니가 예배당을 봉헌한 중앙교회는 진남포에서 가장 큰 교회였다. 나는 그 교회 부설 유치원에 다니며 교회 마당을 우리 집 마당으로 삼아 뛰놀며 자랐다.
외할아버지는 포목사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이자 진남포에서 첫째가는 재력가였다. 북한 사회에서 우리 가문은 ‘부르주아’라 불리며 감시를 받았다. 사회가 점점 억압적으로 변하자 외할아버지는 출가한 맏딸(어머니)만 두고 48년 온 가족과 먼저 월남했다. 어머니는 시댁 식구와 진남포에 남았다. 아버지는 이유 없이 경찰서에 소환되는 날이 잦아졌다. 외부에선 아버지 사업에 개입하고 공장에 쌓아둔 물건을 압수했다. 아버지가 경찰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날도 생겼다.
어머니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위기가 있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어머니가 애타게 기도하면 죄 없이 경찰에 소환됐던 아버지가 이른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때 처음 기도를 듣는 하나님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경찰서에 가면 사람은 돌아왔지만, 재산은 압수됐다. 부모님은 밤마다 몰래 라디오를 들으며 시국을 살폈다. 우리 가족은 1950년 1·4 후퇴 때 외할아버지가 진남포에 남긴 배를 타고 피란길에 올랐다. 그때가 8살이었다. 영화 ‘국제시장’ 주인공이 모습이 당시 우리의 모습이었다. 최근엔 추상미 감독이 만든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전쟁 직후 북한 정부가 전쟁고아 1500명을 폴란드로 보내는 모습에서 나와 오빠, 동생들을 보는 것 같았다. 이들과 우리가 달랐던 건 그때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능력도, 선택도 아니었다. 은혜요 은총이었다. 내가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되는 이유다.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이 만민에 부어지면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요 2:28)고 했다. 내겐 꿈이 있다. 머잖아 북한 곳곳에 무너진 교회가 다시 세워지는 꿈이다. 감리교 서부연회는 ‘북한교회 재건’을 핵심사업으로 삼고 있다. 내가 섬기는 교회는 2017년 9월 4일 서부연회와 97호 북한교회 재건 현판식을 했다. 1913년 증조할머니가 봉헌한 진남포 비석리의 중앙교회를 재건하는 사업이다. 이 일에 시온교회(안용선 목사)가 나섰다. 안 목사는 내 맏아들이자 김보안 권사의 5대손이다. 이후 온 교회와 온 가족이 같은 마음을 품고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