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대중문화계는 빛과 그늘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영화 ‘기생충’이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에서 수상했고, 그룹 방탄소년단(BTS)은 월드투어를 통해 지구촌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버닝썬 게이트’나 오디션 프로그램의 순위 조작 파문처럼 한국 대중문화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도 많았다. 국민일보는 23일 다사다난했던 2019년 국내 대중문화계의 사건·사고를 8개 키워드로 정리했다.
기생충
단언컨대 올해의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을 시작으로 ‘한국영화 최초’의 기록들을 연일 써 내려가고 있다. 빈부격차가 극심한 두 가족을 통해 전 세계가 공감할 만한 양극화 문제를 풍자한 영화는 국내 흥행에 이어 미국과 프랑스 등 해외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북미 반응이 뜨거운데, 각 지역 비평가협회상을 휩쓴 데 이어 골든글로브 감독상과 각본상,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주요 3개 부문 후보에 지명됐다. 내년 2월 열리는 아카데미상(오스카)에서 유종의 미를 거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최우수 국제극영화상과 주제가상 예비후보에 올랐고, 감독상 작품상 등 주요 부문 노미네이트까지 노리고 있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은 ‘기생충’의 수상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다.
1000만 영화 다섯 편
유례가 없는 일이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무려 다섯 편이나 탄생했다. 코미디물 ‘극한직업’부터 마블 히어로물 ‘어벤져스: 엔드게임’, 디즈니 실사영화 ‘알라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기생충’,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까지. 이들 다섯 편의 흥행에 힘입어 올해 극장 관객은 사상 최초로 연 관객 2억2000만명을 넘어서며 연간 최다 관객 기록을 갈아치울 전망이다. 물론 스크린 독과점 문제도 따라붙는다. 일부 대작들이 대다수 스크린을 점유하며 승승장구한 반면 중·소형 영화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극장가 쏠림이 반복되면서 양극화 문제는 심화되고 있는 모양새다. 반독과점영대위는 영화 생태계 회복을 위해 스크린 상한을 두는 영화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버닝썬 게이트
시작은 서울 강남에 있는 클럽 ‘버닝썬’에서 벌어진 단순한 폭행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도화선이 돼 버닝썬이 마약과 성범죄의 온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업주와 경찰 사이의 유착 의혹이 불거지고, 핵심 인물로 그룹 빅뱅의 멤버 승리가 지목되면서 파문은 일파만파 확산됐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서 “성역을 가리지 않는 철저한 수사”를 주문할 정도였다. 연예인들이 단체 대화방에서 ‘몰카’를 유포한 정황이 포착되고 비슷한 시기에 그룹 아이콘 멤버인 비아이의 마약 투약 의혹까지 불거졌다. 승리나 비아이가 속한 거대 연예기획사 YG엔터테인먼트가 직격탄을 맞았다. 이 기획사 수장인 양현석은 모든 직책에서 사퇴했다. ‘버닝썬 게이트’는 여성을 성적 도구로만 바라보는 한국 남성 사회의 강압적인 성 문화를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BTS 월드투어 열풍
미국 빌보드는 지난달 BTS가 월드투어를 통해 티켓 판매로만 1360억원이 넘는 수입을 올렸다고 보도했다. BTS는 100만장 육박하는 표를 팔아치웠고, 이를 통해 회당 평균 67억원이 넘는 돈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이 같은 집계가 BTS의 투어 수입을 전부 드러내는 건 아니다. 팝업스토어 매출, 공연 온라인 생중계 수입 등을 더하면 BTS는 올해 2000억원이 넘는 수입을 올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투어를 통해 BTS는 ‘팝의 성지’로 통하는 영국 웸블리스타디움에서 공연을 열었고, 외국 가수 최초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스타디움 공연을 가졌다. 지난 4월 발표한 음반은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했다. 영국 오피셜 앨범 차트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명실상부한 지구촌 최고의 보이그룹으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사재기 파문
그룹 블락비 출신 가수인 박경은 지난달 SNS에 음원 차트 상위권에 자주 오르내리는 그룹이나 가수 5명(팀)의 실명을 언급하며 “나도 음원 사재기 좀 하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타깃이 된 가수들은 저마다 법적 대응 방침을 밝히면서 강력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여론은 차제에 공공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던 사재기 논란을 종식시키자는 데로 모아졌다. 일반적인 예상을 뛰어넘어 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가수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성시경 크러쉬 헤이즈 등은 사재기와 관련된 구체적인 정황을 들었다거나, 사재기가 없어져야 한다는 뜻을 밝히며 힘을 보탰다. BTS 멤버인 진은 최근 열린 한 음악 시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금 더 정직한 방법으로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게 어떨까. 모두 다 좋은 음악을 하고, 듣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설리와 구하라의 비보
지난 10월 전해진 설리의 비보는 많은 팬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의 SNS에는 보고 싶다거나, 고마웠다는 팬들의 애도 메시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설리의 죽음이 충격적으로 여겨진 것은 그의 미소를 더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설리는 그동안 자주 악성 댓글의 타깃이 되곤 했다. 2014년에는 악성 댓글과 각종 루머에 따른 고통을 호소하면서 활동을 잠정 중단하기도 했었다. 연예계 안팎에서는 악성 댓글을 막는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설리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진 지 한 달여 뒤엔 가수 구하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다. 구하라는 지난 6월 SNS에 “악플 달기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볼 수 없을까요”라고 적었다.
슈퍼스타 펭수
EBS가 만든 열 살짜리 펭귄 캐릭터 펭수는 신드롬을 일으켰다. 아이돌 연습생 출신이자 요들과 댄스, 비트박스 등 잡기에 두루 능한 펭귄이다. 펭수의 카카오톡 이모티콘과 다이어리는 출시 직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펭수 섭외에 성공한 보건복지부 등 정부 부처들은 유튜브에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방송사를 넘나들며 활약 중인 펭수는 29일 MBC 방송연예대상 시상자로도 나선다. 펭수의 매력 포인트로는 거대한 몸집과 조그마한 날개, 초점 없는 눈 등 발랄한 외양이 첫손에 꼽히지만, 최고는 역시 거침없는 행동이다. “EBS에서 잘리면 KBS에 가겠다”는 펭수의 당당함은 밀레니얼 세대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펭수의 유튜브 채널 ‘자이언트 펭TV’ 구독자는 현재 145만명을 넘어섰다.
오디션 예능의 몰락
엠넷 ‘슈퍼스타K’(2009)가 쏘아 올린 오디션 예능 붐은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몰락은 엠넷 간판 예능이자 워너원 등 인기 아이돌 그룹을 배출해 낸 ‘프로듀스’ 시리즈로부터 시작됐다. ‘시청자가 직접 아이돌을 뽑는다’는 얼개로 흥행한 프로듀스가 투표 조작과 연예기획사들의 향응으로 얼룩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공정성’을 기치로 한 여타 서바이벌 예능에 대한 신뢰도 함께 무너졌다. 프로듀스를 이끈 안준영 PD는 최근 법원에서 혐의를 대부분 인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디션 왕국’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해온 엠넷도 심대한 이미지 손상이 불가피하다. 현재 해당 프로그램으로 데뷔한 아이즈원과 엑스원은 존속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다. 제작진의 비윤리적 행위로 아이돌 그룹과 시청자가 피해를 받은 모양새가 됐다.
박지훈 권남영 강경루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