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방화 30대 남성 “초라하게 살고싶지 않았다” 횡설수설

입력 2019-12-23 04:03
22일 오전 광주 북구 두암동의 한 모텔에서 불이 나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경찰과 소방 당국이 화재 현장을 조사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신변을 비관한 30대 남성이 휴일 새벽 라이터로 자신이 묵던 모텔 객실에 ‘묻지마 방화’를 저질러 33명의 사상자를 냈다. 중상자가 많아 2명인 사망자는 더 늘 것으로 보인다.

22일 새벽 5시45분쯤 광주 두암동 한 모텔에서 방화로 보이는 화재가 발생했다. 이 불로 모텔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투숙객 50여명 중 2명이 숨지고 31명이 유독가스를 마시거나 화상을 입었다. 사망 2명, 중상 8명, 경상 22명 등으로 이 가운데 14명이 심폐소생술을 받거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응급환자로 파악됐다. 불은 소방 당국에 의해 20여분 만에 진화됐다.

3층 객실에서 시작된 불이 모텔 건물 전체로 순식간에 번지면서 깊은 잠에 빠진 투숙객들이 화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피해가 컸다. 4, 5층 투숙객들은 연기가 가득 차자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는 등 탈출을 시도하다 크게 다쳤다.

중상자와 부상자는 현재 인근 병원 8곳에 분산돼 치료받고 있다. 불이 난 모텔은 지하 1층, 지상 5층에 연면적 1074㎡로 32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다.

출동한 경찰은 3층 객실에 라이터로 불을 지르고 달아난 혐의(현주건조물 방화치사상)로 김모(39)씨를 긴급 체포해 조사 중이다. 일용직 근로자인 김씨는 경찰에서 “더 이상 초라하게 살고 싶지 않아 죽으려고 불을 질렀다”고 말하는 등 횡설수설하고 있다. 구체적인 방화 경위에 대해선 진술을 하지 않는 상태다.

투숙한 모텔방에 불을 지른 혐의로 체포된 김모씨가 전날 밤 해당 모텔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김씨는 밤 12시쯤 혼자 투숙했다가 5시간여 만인 이날 새벽 5시45분쯤 3층 자신의 객실 베개에 불을 붙인 뒤 달아났다. 그 후 병원에서 화상 치료를 받던 중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베개에 불을 붙인 뒤 이불을 덮어놓고 나왔다가 방에 놓고 온 가방을 찾으러 다시 방으로 가 문을 열자 불길이 크게 번졌다”고 진술했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는 불길이 쉽게 퍼지도록 화장지를 방안에 잔뜩 풀어놓고 달아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화재 진압 후 곧바로 CCTV 영상과 현장 상황 등을 근거로 발화 지점인 3층 객실에서만 불이 급속히 번진 점에 주목, 방화에 무게를 두고 용의자 추적에 나섰다. 경찰은 이 객실의 침대와 가구가 모두 불에 탄 사실을 토대로 투숙자였던 김씨의 신원을 확보해 행방을 뒤쫓았으며 병원에서 화상 치료를 받던 그를 검거했다.

인근 오피스텔에서 생활하던 김씨는 불을 지르고 모텔을 황급히 빠져나갔지만 두고 온 가방을 챙기기 위해 돌아갔다가 화상을 입었다. 이후 모텔에서 출동한 소방관에 의해 가장 먼저 구조돼 병원에 옮겨진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김씨가 자신의 경제적 처지를 비관해 불을 질렀다가 크게 번지자 놀라 무작정 달아난 것으로 보고 있다.

불이 나자 소방 당국은 소방차 등 소방장비 48대와 267명의 인력을 동원해 진화·인명구조 작업을 벌였다. 불이 난 모텔 건물은 1997년 5월 숙박업소 승인을 받아 영업을 해왔다. 지은 지 22년이 지난 노후 건물이었으며, 3급 특정 소방대상물로 규정돼 스프링클러와 옥내 소화전을 설치할 의무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김씨가 병원 치료를 마치는 대로 ‘묻지마 방화’ 등 정확한 범행 동기를 조사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