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美 국적 한국인 상대로 ISD 첫 승소엔 범정부 총력전 있었다

입력 2019-12-22 18:26

한국 정부가 미국 국적 개인투자자가 제기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에서 지난 9월 승소한 배경에 ‘범부처 총력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청와대와 17개 정부부처가 긴밀하게 협력해 승리를 이끌어냈다. ISD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가가 협정상 의무나 투자계약을 어겨 투자자(개인 또는 법인 등)가 손해를 봤을 때 상대국 정부를 대상으로 국제중재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이와 달리 한국 정부는 지난 21일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수·합병(M&A)을 둘러싼 ISD에서 패소 확정 판정을 받아들었다.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제기한 5조원 규모의 ISD,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의 1조원대 ISD 같은 ‘큰 싸움’도 남아 있다. 하지만 정부가 ISD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지 ‘깜깜이’다. 패소하면 세금으로 소송비용, 배상금 등을 줘야 한다. 이에 따라 정부가 전략을 제대로 짜고 체계적으로 대응하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2일 정부에 따르면 청와대 통상비서관은 지난 9월 20일 청와대 여민2관 2층 회의실에서 통상담당관회의를 열었다. 안건은 ‘서울 마포구 재개발 사업 관련 ISD’였다. 회의 개최 사실과 논의 내용은 모두 ‘대외비공개’였다. 회의에는 소송을 직접 맡은 법무부 외에 국무조정실,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등 16개 정부부처 국장급 인사들이 참여했다.

총력전을 펼친 대상은 미국의 개인투자자였다. 미국 국적을 취득한 한국인 이민자 A씨는 지난해 7월 자신이 투자한 서울 마포구 토지의 재개발사업 수용·보상 과정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배했다며 ISD를 제기했다. A씨는 수용 보상금 부족분 약 200만 달러, 부동산 강제집행 과정에서 발생한 정신적 피해 배상금 100만 달러를 청구했다.

정부는 상대적으로 금액이 작지만 유사 사례가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해 관계부처 실·국장급으로 구성된 분쟁대응단을 설치했다. 법무부는 정부를 대리할 법무법인(로펌)으로 화우를 선정했다. 분쟁대응단과 화우는 서울시, 관계부처와 협력해 법리 검토를 진행했다.

정부는 몇 가지 쟁점에 주목했다. 주거용 부동산 매입이 투자로서 적격성을 띠는지 여부, FTA 시행 당시 투자가 이뤄졌는지, 국내 법원과 행정재판소에 FTA 의무 위반을 주장했을 때 ISD를 제기할 수 있는지, 위반 사실을 최초로 인지한 뒤 중재를 제기한 시점이 적당했는지 등이다. 법리 검토를 마친 정부는 ‘한·미 FTA에 따른 신속절차’(중재판정부의 본안 심리 전 항변 사유에 대해 판정부가 최장 210일 내 판정하도록 하는 절차)를 신청했다. 이어 ‘본안 전 항변 사유에 대한 판단’만으로 승소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 사례는 정부의 ISD 첫 승소로 기록됐다. 그러나 잇따르는 ISD는 먹구름에 싸여 있다. 론스타와 엘리엇 등 현재까지 누적된 ISD 소송 청구액은 9조원을 넘어선다. 그런데도 정부가 어떤 전략으로 ISD에 대응하고 있는지 국민은 물론 전문가들도 모른다. 소송별로 정부를 대리하는 로펌도 제각각이라 일관성 있는 대응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전문가들은 ‘9월 승소’처럼 정부부처의 총력 대응, 치밀한 법리 검토 외에 투명한 공개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통상 전문가 송기호 변호사는 “ISD는 한 정부의 공공정책을 상대로 하는 국제소송이다. 패소하면 중재비용이나 변호사 비용까지 국가 예산으로 책임져야 한다”면서 “ISD 소송 진행과정이나 결정문이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현재로선 소송에서 유리한 쟁점들을 제대로 다루고 있는지 감독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세종=전성필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