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천지우]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입력 2019-12-23 04:04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데도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는다. 신기한 일이다. 조국 사태에 이어 청와대 하명수사, 감찰 무마 의혹이 터졌다. 경제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주변국 외교도 위태로운 가운데 북한은 비핵화 카드를 버리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굳건하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대안의 부재와 대통령 개인에 대한 호감이다. 집권 세력에 문제가 생기면 자연히 반대 세력(야당)에게 시선과 기대가 향할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자유한국당은 더 많은 국민들로부터 호감을 얻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스타일과 이미지, 콘텐츠와 비전 모두 나쁘거나 구리다. 현 정권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만을 기대할 뿐 자기 혁신을 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야당이 아무리 지리멸렬해도 대통령 개인이 비호감이라면 야당에 희망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정수행 지지율이 아닌 문 대통령 개인에 대한 지지율이 57.4%에 달했다. ‘임기 끝까지 지지하겠다’는 강한 지지층도 40%를 상회했다. 국정이 삐걱거려도 문 대통령의 점잖고 선한 이미지가 높은 신뢰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만으로 내내 먹고살 수는 없다. 지금의 악재들이 해소되지 못하고 더 악화된다면 신뢰가 급격히 무너질 수 있다. 콘크리트라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층도 일순간에 부서졌다.

나는 문 대통령의 지금까지 성과뿐 아니라 이미지에도 의문을 품게 됐다. 다독가이면서 여러 책의 저자인 문 대통령이 국민에게 추천하는 도서 목록이 그의 국정 퍼포먼스만큼이나 감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최근에 권한 도올 김용옥의 책만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다양한 분야의 신간을 추천해 왔지만 ‘정말 깊이 있다, 멋지다’ 싶은 게 별로 없었다.

책은 무작정 많이 읽는다고 좋은 게 아니다. 안 좋은 책은 읽어봤자 시간만 버린다. 양서를 읽어야 도움이 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퇴임 직전 뉴욕타임스 서평가 미치코 가쿠타니와의 인터뷰에서 “8년 임기 동안 판단 기준이 돼준 것은 셰익스피어였다”고 말했다.

한 해가 저무는 지금, 대통령은 물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만 짬이 난다면 그 시간에 고전문학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한 해를 차분히 정리하고 심기일전해서 새해를 맞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도 “매일 우리가 논쟁하는 것들의 표면 아래에 있는 진실을 깨닫는 데 픽션이 유용하다”고 했다.

‘파이 이야기’(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원작)로 유명한 캐나다 소설가 얀 마텔은 “나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어떤 책을 읽는지가 나에게는 무척 중요하다. 그가 선택한 책을 근거로 그의 생각과 행동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텔은 2007년부터 4년간 스티븐 하퍼 당시 캐나다 총리에게 문학 읽기를 권하는 편지를 100통 넘게 보냈다. 언급한 책도 매번 동봉했다. 그러나 하퍼 총리는 제대로 읽지 않은 것 같다. 보좌관을 통해 성의 없는 답장 몇 통만 보냈을 뿐이다.

마텔이 보낸 편지들은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부터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미시마 유키오의 ‘오후의 예항’, 루쉰의 ‘광인일기’까지 다양한 작품이 소개돼 있다. 문 대통령이 이 중에 골라서 읽고 감상을 얘기해줬으면 좋겠다.

이 책의 한국판에는 출간 당시(2013년) 갓 취임한 박 전 대통령에게 마텔이 보내는 편지가 있다. 마텔은 “픽션을 읽는 것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하나의 방법”이라며 집무실에서든 침실에서든 문학작품을 열심히 읽어야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조언을 듣지 않아서인지 그저 그런 대통령도 되지 못했다. 문 대통령은 그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한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