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 교회가 또 무슨 사고를 치지 않나 하고 마음 졸이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즐비한 현실. 우리 교회를 생각하면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뛰는 교회라면 얼마나 감사할까요.
성경 기록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자마자 복을 주시면서 동시에 사명도 주셨는데요, 충만하고 번성하고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사명입니다. 가만히 앉아있거나 모여 있거나 해서는 안 될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명을 감당하기는커녕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실 정도로 타락하여 물로 심판을 당하지요.
하나님이 다시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처음 주신 말씀 역시 놀랍게도 창조 때 주신 말씀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또다시 사명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바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8)
여기 흩으셨다는 말씀을 주목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약으로 넘어가면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 유언 같은 말씀을 남기십니다.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유언적 사명을 감당했을까요? 그들은 흩어지지도 않았고 사명 또한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수천 명씩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기자 ‘우리 교회 대형교회 되니 좋네’ ‘사람들이 몰려오니 신나네’하면서 안주했지요. 그러자 하나님은 바벨탑에서 일하셨던 것처럼 일하십니다. 바벨탑에서 행하신 일을 초대교회에서도 행하셨습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정확하게 이유도 같습니다. 흩어지라는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모든 지명을 등장시키면서 기억을 떠오르게 하십니다. 참 끈질깁니다. 사명을 망각하고 사명에 역행하는 인간도 끈질기지만 그 사명을 위해 살라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간을 흩으시는 하나님도 끈질긴 분이십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우셨다는 기록은 보이지만 웃으셨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쁨이 어디에 있었는지 성경은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본문인 누가복음 15장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는 이야기입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 그리고 탕자가 돌아온 비유를 통해서입니다. 양과 드라크마를 찾으셨을 때 얼마나 기쁘셨으면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잔치를 여셨을까요. 그냥 잃어버린 채로 두는 게 이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어코 찾으시고 나서 너무 기쁜 나머지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열자고 하셨습니다. 과연 잔치 비용이 양 한 마리 정도일까요? 돌아온 탕자 때도 그랬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손해 보는 일이지요. 그냥 잃어버린 셈 치면 조금 손해 보고 말 일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찾아 더 많은 손해를 자초하십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게 기쁘셨으니까요.
교회 역시 이익을 창출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손해를 보면서라도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공동체가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는 계산기를 두들겨 플러스 전략을 세우는 게 교회가 아니라 마이너스가 되더라도 죽어가는 영혼이 살아날 수만 있다면, 쓰러져 가는 사람이 세움을 받을 수 있다면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위해 존재하다가 교회가 적자가 나면 그 적자는 하나님이 채우시고 이끄십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손해 보는 장사, 즉 잃어버린 것들을 찾으시면서 파티를 여시고 기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과 함께 영혼을 향하여 달려나가 파티를 즐기는 복된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정용비 목사(전주온누리교회)
◇정용비 목사가 섬기는 전주온누리교회는 ‘예수님처럼’이라는 핵심가치를 붙들고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공동체가 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지역주민들이 “온누리교회가 곁에 있어 좋다”며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교회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