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추운 겨울이 오면 타지에 사는 이모할머니가 우리 집에 간혹 머물다 가시곤 했다. 나와 동생들은 우리를 마냥 예뻐해 주시는 할머니의 방문을 좋아했지만, 사실 더 반가워했던 건 할머니표 특제 밀가루 부침개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그때그때 부엌에 남아있는 밀가루와 우유, 계란과 설탕 등을 섞어 노릇하게 굽는 단순한 간식이었다. 그럼에도 먹거리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 갓 구운 따끈한 반죽 속 우유의 고소함과 설탕의 달큼함에 반해 나와 동생들은 뜨끈한 방바닥에 뒹굴거리다 부침개 한입씩 집어먹는 재미에 폭 빠지곤 했다.
성공한 어른의 조건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정의가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밥벌이할 능력과 존경하는 작가나 작품이 있고, 자기만의 음식을 하나쯤은 할 줄 아는 것이 되겠다. 외국에서는 집에 손님을 초대하면 남녀를 불문하고 호스트가 자기만의 요리를 선보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레시피라면 더욱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창피하게도 나 역시 아직 다 갖추지 못한 조건이지만, 어른이라면 자신이나 가족을 위한 최소한의 생계 능력, 영혼의 음식인 문화적 소양과 함께 자기만의 음식으로 나와 남을 먹일 줄 알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뇌의 건강한 발달을 돕고 악영향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정서적 안정은 많은 부분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생존이 위협받지 않는 따뜻한 분위기, 우리 집만의 음식, 그리고 행복한 냄새. 후각은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변연계에 가까이 위치해 있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추억 속의 냄새를 맡으면 그 순간의 감정과 기억이 떠오르고, 길을 가다가도 갓 구운 빵이나 맛있는 음식 내음을 맡으면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거나, 배가 고프지 않아도 사먹고 싶어진다. 필자의 어린 시절 밀가루 부침개처럼, 추운 겨울 자신의 뇌와 마음을 따듯하게 지켜줄 추억의 음식이 있는가? 아직까지 없다면 이번에 하나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호호 불어가며 먹는 갓 구운 고구마라도 좋다. 좋은 기억과 함께 맛과 향을 누군가와 같이 나눌 수 있다면, 비록 추운 계절이어도 꽤 괜찮은 겨울의 추억이 될 것이다.
배승민 의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