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시간 쪼개기 계약… 못쉬고 못받는 경비원

입력 2019-12-19 04:00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던 김모(72)씨는 지난 5월 경비실에서 급성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을 거두기 전까지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했다. 김씨의 근로계약서(사진)에 적힌 근무시간은 오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7시. 이 가운데 오전 11시~오후 2시, 오후 7~8시, 오후 11시~오전 6시까지 총 11시간이 휴게시간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쉬어야 할 낮시간에 화단의 풀을 뽑거나 낙엽을 쓸었다. 심야시간에는 주차 민원과 취객을 상대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경비실 앞에 휴식시간이 적혀 있었지만 불이 꺼지거나 창문 커튼이 내려진 적은 없었다. 김씨는 제초작업을 마치고 경비실에 들러 한숨 돌리려던 차에 갑자기 쓰러졌다고 한다. 김씨 가족은 이런 근로 여건을 들어 그의 죽음이 업무상 재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경비업체 측은 계약서상 적법하게 휴게시간을 부여해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김씨처럼 주로 고령자가 많은 아파트 경비원들 사이에서 휴게시간을 쪼갠 근로계약이 일상화되고 있다. 최저임금이 인상되고 업무상 재해 인정 요건이 완화됐지만 정작 휴게시간을 쪼개는 등 편법이 동원되면서 이처럼 ‘쉴 틈 없는 휴게시간’을 담은 계약서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아파트에서 18일 만난 경비원 이모(71)씨 역시 휴게시간이 네 차례로 나뉜 계약서를 작성했다고 했다. 이씨는 “원래 휴게시간이 10시간이었는데 두 달 전 업체로부터 2시간 늘리겠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일하는 건 그대로인데 월급은 15만원 정도 줄었다”고 했다. 이씨는 “그래도 이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게 어디냐”며 말을 아꼈다. 이씨는 이 아파트에 오기 전 동작구 아파트에서 3개월짜리 근로계약서를 세 번 썼다고 했다.

계약서상 휴게시간이 느는 현상은 설문조사로도 확인된다. 서울노동권익센터가 지난 10월 서울 4개구 아파트 경비원 490명을 조사한 결과 계약서상 휴게시간은 지난해보다 평균 59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계약서에 명시된 휴게시간에 비해 실제 쉰 시간은 3시간가량 적었다. 500세대 미만인 중소 규모 아파트 단지 경비원일수록 이런 경향이 짙었다.

토마토 노무법인 유연주 노무사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업체들이 김씨처럼 쪼개기 휴게시간을 근로계약서에 명시하는 일이 많아졌고 상담도 늘었다”며 “실제로는 일을 하는데 계약서에 적혀 있는 휴게시간 때문에 사고가 나거나 질병이 생겼을 때 업무 연관성을 인정받기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올 들어 8월까지 뇌심혈관계 질병으로 사망한 경비원의 유족들이 산업재해 급여를 청구한 사례는 총 30건이다. 이 가운데 20건이 승인을 받았다. 2016년 39건 중 30건이 불허됐던 것에 비하면 승인율이 크게 올랐다.

이는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1월 업무상 재해 인정 요건을 완화한 데 따른 영향이 크다. 업무와 재해 사이 연관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12주 동안 업무시간 1주 평균 60시간 초과’에서 ‘52시간’으로 바꾸고, 야간근무는 주간근무의 30%를 가산해 업무시간을 산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거꾸로 업체들이 업무상 재해 인정을 받기 어렵도록 꼼수를 쓰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강경모 대륜 노무사는 “쪼개기 휴게시간이 불법은 아니나 정해진 휴게시간에 온전히 쉬지 못하고 대기하는 것, 임금을 줄이기 위해 명목상 휴게시간을 의도적으로 늘리는 부분은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효석 박구인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