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로 설계·품평… 현대차 ‘가상 개발 프로세스’ 본격 가동

입력 2019-12-19 04:05
현대·기아자동차 연구원들이 VR(가상현실) 장비를 착용하고 가상공간에서 신형 쏘나타 자동차를 분해해 설계 품질을 검증하고 있다. 현대·기아차 제공

가상현실(VR) 장비를 차고 고글을 쓰자 100평 남짓한 실내공간이 순식간에 광활한 차고로 변했다. 여러 대의 거대한 상용 트럭들이 저 멀리 실물 같은 모습으로 줄 지어 서 있었다. “놀라지 마세요.” 연구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대자동차의 수소 전용 대형트럭 콘셉트카 ‘넵튠’이 눈앞으로 쏜살같이 다가왔다. 지난해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주인공 앞에 거대 킹콩이 달려오던 순간처럼, 놀랄 만한 현실감에 체험에 참여한 아바타(기자)들이 저마다 움찔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현대·기아차가 자동차 개발 과정을 혁신해 새로운 형태의 모빌리티로 나아가는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를 본격 가동한다. 17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기술연구소에서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 중 VR을 활용한 디자인 품평장과 설계 검증 시스템이 미디어에 첫선을 보였다.

양희원 현대·기아차 바디담당 전무는 “시장 변화에 따라 유연하고 신속한 대응을 위한 버추얼 개발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시스템 구축의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새로운 세계에서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리를 먹는 게 아니라 빠른 물고기가 느린 물고기를 먹는다”며 “현대·기아차의 경쟁력이자 큰 도약을 위한 토대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연구원과 디자이너가 VR을 활용해 헤드램프를 디자인하고, 실내 장비나 바퀴 등을 가상으로 작동시켜 보는 모습(위부터). 현대·기아차 제공

실제 체험해 본 VR 디자인 품평은 참가자들에게 비주얼 충격을 선사했다. 영상 브리핑이 진행되던 품평장에서 VR장비를 착용하자마자 착용자가 가상세계 속 하나의 아바타로 변환됐다. 상용트럭 여러 대가 주차된 가상공간은 설정에 따라 실내, 야외, 주야간, 눈 오는 겨울 등 다양한 환경으로 빠르게 변모했다. 차량 외부 디자인을 실물처럼 볼 수 있는 데서 나아가 평가자가 직접 차량 내부로 들어가 실내 장비가 동작하는 모습을 실제처럼 체험할 수도 있었다.

현대·기아차는 올해 3월 150억원을 투자해 세계 최대 규모의 최첨단 VR품평장을 완공했다. 20명이 동시에 VR을 활용해 디자인을 평가할 수 있으며 실물 자동차를 보는 것과 똑같이 각도나 조명에 따라 생동감 있는 디자인 감상 및 실내 기능 확인이 가능하다. 시연 관계자는 “실제 정의선 수석부회장을 비롯한 그룹 경영진이 매달 모여 최신 개발 차들의 디자인 품평에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품평장 내에 설치된 36개의 모션캡처 센서다. 평가자가 착용한 VR장비의 움직임을 1㎜ 단위로 정밀감지해 평가자들은 가상의 공간에서 간단한 버튼 조작만으로 차량 부품, 재질, 컬러 등을 마음대로 바꿔보며 디자인을 살펴보고 고객 눈높이에서 최적의 모델을 도출할 수 있다.

현대·기아차는 VR을 통한 설계 품질 검증 시스템도 6월부터 시범 운영 중이다. 모든 차량 설계 부분의 3차원 데이터를 모아 디지털 차량을 만들고, 가상환경에서 전반적인 설계 품질을 평가할 수 있다.

현대·기아차는 지난 7월 미래 모빌리티 개발 대응을 위해 연구개발본부 조직체계를 ‘아키텍처 기반 시스템 조직’으로 개편한 바 있다. ‘넵튠’ 최종 디자인 평가로 시범 운영된 VR 디자인 품평은 향후 모든 개발 신차에 확대 적용될 예정이며, 조만간 세계 각지 디자인센터와 협업해 전 세계 디자이너들이 하나의 가상공간에서 차량을 디자인하고, 평가에 참여하는 원격 VR 디자인 평가 시스템도 구축할 예정이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