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장점이 두 가지면 사는 데 충분하다

입력 2019-12-19 00:05

내가 사는 집 바로 뒤에 교도소가 있다면, 숨기고 싶지 않을까. 교도소가 먼저 있던 곳에 집을 지었든 집을 지었는데 교도소가 들어섰든 별로 유쾌한 상황이 아닐 테니까. 그런데 왕년의 명배우였던 파비안느는 자신의 집 뒤에 교도소가 있는데도 개의치 않는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야기다. 그녀는 전성기가 지났다. 주연은 떠오르는 신예 배우의 몫이다. 밀려나는 서글픔이 있을 법도 한데, 여전히 도도하고 당당해 보인다.

갓 출간된 회고록 상당 부분이 생략되거나 왜곡됐다며 항의하는 딸에게 “나는 배우라서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아. 진실은 전혀 재미없거든”이라고 대꾸한다. 이런 당당함은 그녀가 성공한 여배우이기 때문에 가능한 걸까.

오늘도 스마트폰과 TV에는 잘나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 세계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이 얼마나 유행에 뒤졌는지, 지금 당신이 먹고 있는 요리가 얼마나 건강에 해로운지, 지금 당신의 재테크가 얼마나 미련한지를 이들은 집요할 정도로 성실히 일깨워 준다. 어서 운동을 더 해야 하고, 돈을 더 벌어야 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다그치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런 세상 속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 소득이 줄어든다는 것, 아프다는 것은 눈에 잘 띄던 자리의 책꽂이에 있던 책이 점점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밀려나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고인이 된 철학자 김진영 교수는 암 선고를 받고 임종 3일 전까지 기록했던 일기 유고집 ‘아침의 피아노’에서 건강한 사람들을 만나는 환자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꾸 사람들을 피하게 된다. 위안을 주려는 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게 된다. 병을 앓는 일이 죄를 짓는 일처럼, 사람들 앞에 서면 어느 사이 마음이 을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환자의 당당함을 지켜야 하건만….’

1등, 건강함, 성장함, 유명함…. 이런 고음들로만 채워진 노래는 우리를 피곤하게 만든다. 이런 음들은 소수의 사람에게 허락되고, 허락된다 하더라도 삶의 한 시절에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의 절정이다. 삶은 훨씬 길고 여러 높낮이로 채워진 노래다. 올라가면 내려올 날도 있고 쉬어가는 순간도 있으며 언젠가는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이 모든 요소를 받아들여 자신만의 목소리로 청중과 교감을 나눌 때 노래는 모두에게 선물이 된다.

다시 파비안느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영화 속 그녀 역시 자신이 예전만큼의 인기와 연기력을 갖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다. 전 남편은 죽었다고 했지만, 맘에 들지 않을 뿐 여전히 살아서 불쑥 집으로 온다. 딸은 배우였던 엄마의 부재로 인한 정서적 외로움을 중년이 돼서도 뾰족하게 표출한다. 평생 함께한 매니저를 회고록에서 언급하지 않아 매니저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배우 빼곤 대부분 낙제점이다. 그녀도 잘 안다. 그런데도 당당히 말한다. “장점이 두 가지면 사는 데 충분하고도 남아.”

연말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평가의 시간을 가질 때, 파비안느의 당당함을 가져보면 어떨까. “올해 이 두 가지는 잘했어.” “이런 점은 발전하고 성장했어.” “잘 버텨왔어. 고생했어.” 누구나 인생 뒤편에 교도소 몇 채씩 가지고 산다. 을처럼 위축되는 아픔도 있다. 그래도 삶을 긍정하는 것, 축복하는 것, 사랑하는 것, 당당해도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삶을 선물로 기뻐하는 법이 아닐까.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 3:12~13)

성현 목사(필름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