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 담긴 추억·사연이 거미줄에 엮인 듯…

입력 2019-12-18 04:05
개인전이 열리는 부산시립미술관 전시장에서 포즈를 취한 시오타 치하루. 실을 거미줄처럼 엮어 피아노, 의자, 침대 등 사물과 연결하는 작업이 유명해 ‘거미 여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불탄 피아노는 이웃집 화재에서 살아남은 피아노에서 받았던 감동에서 영감을 얻었다. 아마추어 사진가인 한국인 남편이 찍은 이 설치 작품을 부산 전시 포스터로 썼다.

손가락으로 뜨개질을 하듯 기둥을 만들어가는 솜씨가 거미처럼 재발랐다. 왜 그에게 ‘거미 여인’이란 별명이 붙었는지 알 것 같았다. 지난 15일 부산 해운대구 부산시립미술관. ‘시오타 치하루: 영혼의 떨림’전 개막을 이틀 앞두고 작가는 막판 설치 작업으로 분주했다. 흰 벽면에 거미줄처럼 고정시킨 붉은색 실이 동굴의 종유석처럼 엮여져 바닥의 배들에 이어져 있었다. 누구라도 그 공간에 들어서면 미래의 불확실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은 묘한 불안과 고독에 빠져들 것 같았다.

시오타 치하루(47)는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일본관 대표로 나갔던 일본의 대표적인 중진 여성작가이다. 이번 전시는 지난 6월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열렸던 회고전의 첫 해외 순회전이다. 그의 한국 첫 개인전이기도 하다.

오사카 출신의 시오타는 중고교 시절 오직 화가를 꿈꾸었지만, 붓 대신 택한 것은 실이었다. 드로잉을 하듯이 실을 사용해 “공기에 선을 긋는 작가”가 되었단다.

“정작 미대에 입학하고선 회화에 회의감이 일었어요. 그림은 기술이 우선시되는 것 같아 붓질에서는 내 정체성을 느낄 수 없었거든요.”

독일 유학 후 작업세계는 행위예술과 접목됐다. 페미니즘 미술, 행위예술의 대모로 불리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교수로 있는 브라운슈바이크대학에서 수학했다. 스승에 대해서는 “아브라모비치는 신체를 사용해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저는 페미니즘 작가는 아니지만 그로부터 많은 걸 배웠다. 좋은 교수는 잘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작품을 대하는 태도, 그 뒷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오타도 초기에는 몸에 붉은 물감을 붓는 등 자신의 신체를 직접적으로 쓰는 퍼포먼스를 했다. 2000년대에 시작한 지금의 ‘거미줄 작업’은 미술관 등 특정 공간에 실을 엮는 퍼포먼스의 결과가 작품이 되는 것이라 작품의 결이 좀 달라졌다.

실은 붉은색과 검은색 두 가지 색상을 주로 사용한다. 검은색은 우주를, 붉은색은 인연을 상징한다. 그 실은 피아노 침대 신발 의자 열쇠 등 사물에 연결돼 있다. 그는 “누군가 자던 침대, 누군가 쓰던 장난감, 누군가 앉았던 의지다. 거기에 보이지 않는 기억과 사연이 있다. 그 기억과 추억을 실로 엮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작품에는 유년기 가족의 묘에서 느낀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이웃집 화재에서 용케 살아남은 피아노가 주던 묵직한 떨림 등이 녹아 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의 의미를 형상화하며 불확실성에 맞서는 삶의 내면을 시적으로 표현한다.

이번 전시는 각별하다. 2016년 모리미술관에서 전시를 제의했을 즈음 난소암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전시 준비는 곧 투병의 과정이기도 했다. 그는 “투병 과정에서 마치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안에 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암 진단, 수술, 장기 적출, 항암치료 등 시스템처럼 돌아가 정작 나는 누구인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하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더라”며 “그 과정에서 영혼의 떨림을 떠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암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딸이었다. 외동딸의 팔을 캐스팅해 만든 작품을 보여주면서 그는 “이제는 다 나았다. 머리카락도 자라고…”라며 단발머리를 쓸어 올리며 웃었다. 모리미술관 전시는 66만명이 관람하는 대히트를 쳤다.

남편은 부산 출신이다. 한·일관계가 냉각돼 전시가 무산될까 조마조마했다는 그는 부산 전시가 성사되자 시어른들이 정말 기뻐하셨다고 했다. 작가 인생 25년을 보여주는 이번 전시에는 4개의 대형 설치작업을 비롯해 조각 드로잉 사진 퍼포먼스 기록영상 등 110여점이 나왔다. 내년 4월 19일까지.

부산=글·사진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