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명의 시민이 구세군 자선냄비를 지나쳤지만 지갑을 여는 이는 드물었다. 초등학생 키만 한 냄비가 무색해 보였다. 아침부터 짙게 깔린 안개 탓인지 대부분 시민이 고개를 숙이고 제 갈 길을 가기 바빴다. 구세군 종소리가 쉴 새 없이 일대에 울려 퍼졌지만 그 종소리를 향해 눈길을 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기자는 17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6번 출구 앞에서 자선냄비 모금을 위한 일일체험에 나섰다. 붉은 구세군 점퍼를 입고 핸드벨을 흔들며 “사랑을 나눕시다, 어려운 이웃을 도웁시다”라고 외쳤다. 한국교회 22개 주요 교단과 국민일보, CBS는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나부터 이웃사랑 캠페인’을 2017년부터 이어오고 있다.
핸드벨을 1시간 흔드는 동안 길을 묻는 이가 두 명 있었다. 사이렌을 울리며 환자를 실은 구급차가 3대 지나갔다. 대로 건너편에선 데모하는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한 무리의 젊은 직장인들을 제외하곤 웃으며 지나가는 이가 1시간 내도록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잿빛이니 날이 더 춥게 느껴졌다.
40여 분이 지나도록 기부하는 이가 없었다. 목소리를 높이고 종을 더 세게 흔들어 보았다. 종을 흔드는 팔이 아팠지만 초조함이 더 밀려왔다. ‘설마 1시간 동안 한 명도 기부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때 때 묻은 점퍼를 입은 청년 한 명이 다가왔다. 자선냄비에 봉투를 급히 넣고 부끄러운 듯 갈 길을 갔다. 그를 붙잡고 기부한 이유를 물었다. 서울 구로구에 사는 직장인 신동영(34)씨는 매년 헌혈증 여러 장과 약간의 돈을 구세군 자선냄비에 넣어왔다고 한다. 헌혈증을 기부해 백혈병 환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사람들이 다투기만 하는 모습을 보고 신씨는 한때 이민을 갈까도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도 경기가 조금 풀리면 살기가 좀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있다. 신씨는 “커피 한 잔 덜 마시면 한두 명이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기부했다”며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을 통해 어려운 이웃과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노숙인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일체험이 마감될 즈음 한 여성이 자선냄비를 향해 걸어와 지폐 한 장을 수줍게 넣었다. 서울 강서구에서 왔다는 크루즈 승무원 이인선(31·여)씨는 “추운 겨울 굶주릴 이웃을 생각하며 기부했다”며 “작은 보탬이지만 전국에서 사랑의 마음이 많이 모였으면 한다”고 말했다.
1시간 동안 두 번째 기부하신 분이라고 말하자 이씨가 짐짓 놀라워했다. 이씨는 “월급은 오르지 않고 대출금 갚기도 빠듯하다”며 “그나마 나는 일하지만 출산한 친구들은 복직조차 힘들다”고 털어놨다. 그는 “주변에서 온통 어렵다는 이야기뿐”이라며 “그래도 시민들이 함께 힘을 합쳐 어려운 연말을 이겨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동우 기자 lov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