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과 대화 실종된 국회 ‘거리 정치’에 포위당했다

입력 2019-12-17 04:04
자유한국당 주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선거법 날치기 저지 규탄대회’에 참석한 보수 단체 회원들이 16일 국회 본관으로 몰려가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방호 인력과 경찰이 이를 막아서면서 충돌이 벌어졌다. 폭언과 폭행이 난무하는 등 국회가 난장판이 됐다. 결국 국회의 모든 출입구가 봉쇄됐고, 국회 앞 대로도 차량 출입이 통제됐다. 최현규 기자

협상과 타협의 묘가 실종된 국회가 ‘거리 정치’에 포위당했다. 자유한국당이 16일 국회에서 주최한 ‘고위공직자수범죄수사처(공수처법)·선거법 날치기 저지 규탄대회’에 참석한 보수단체 회원들이 국회 본관 진입을 시도하면서 난장판이 벌어졌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상황에 국회로 통하는 모든 출입구가 봉쇄됐고, 국회 앞 대로도 차량 출입이 전면 통제됐다. 대화보다 장외 여론전에 몰두한 정치권이 자신들이 부추긴 거리의 분노를 결국 국회 안으로까지 끌고 온 셈이 됐다.

일명 ‘태극기 부대’를 비롯한 20여개 보수 성향 시민단체로 구성된 ‘반대한민국세력축출 연대’ 소속 1000여명은 한국당 규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국회로 집결했다. 예상했던 500여명보다 두 배 많은 인원이 국회 본관 앞 계단을 가득 메우면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여러분이 국회에 들어온 것 자체가 이미 승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황교안(오른쪽 마이크 든 사람) 자유한국당 대표가 16일 국회 본관 앞에서 공수처법·선거법 날치기 저지 규탄대회를 열고 있다. 이 집회 참석자들이 본관 진입을 시도하면서 방호 인력 및 경찰과 충돌했다. 연합뉴스

본래 국회는 옥외집회와 시위가 금지된 장소다. 다만 정치권은 관행적으로 규탄대회 또는 결의대회란 이름 아래 국회 안에서 집회·시위를 해왔다. 한국당은 이날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에게 그간 정치권이 해왔던 수준에서 평화적으로 규탄대회를 열겠다며 양해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날은 문희상 국회의장이 여야 합의가 불발될 경우 공수처법과 선거법 개정안을 본회의에 상정하겠다고 예고한 날이어서 집회 참가자들이 잔뜩 흥분된 상태였다. 결국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보수단체 회원들이 국회 본관으로 통하는 4개 문으로 난입을 시도했고 방호 인력과 경찰이 이를 막아서면서 충돌이 벌어졌다. 출입구마다 ‘문희상을 쳐라’ ‘빨갱이는 물러가라’는 식의 원색적인 구호가 넘쳐났고, 일부는 경찰과 방호 인력에게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이들은 본관 앞에 위치한 국회의장 및 교섭단체 당대표·원내대표 주차 표지석도 훼손했다. 문 의장의 주차 표지석에는 ‘개XX’라는 욕설이 쓰여 있었다. 여기에다 국회 담장 밖에도 시위 인원이 집결해 결국 국회로 진입하는 모든 출입구가 봉쇄되기도 했다.

규탄대회장 부근에서 농성하던 정의당 관계자들이 폭행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보수단체 회원들이 청년당원들의 따귀를 때리거나 머리채를 잡았고,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강민진 정의당 대변인은 전했다.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보수단체 회원들과의 물리적 충돌로 쓰고 있던 안경이 날아가기도 했다.

문 의장은 입장문을 통해 “특정 세력 지지자들이 국회를 유린했다”며 “한국 정치에 데모크라시(민주주의)는 온데간데없고, 비토크라시(Vetocracy·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만 난무하고 있다. 국민이 거리로 나오게 하는 상황을 자초한 것도 모자라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막장 정치를 초래한 책임이 정치권에 있다고 지적했다. 박상병 인하대 초빙교수는 “국회가 제 역할을 못하니 국민들이 국회 안까지 들어와 농성하고 적의를 품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심우삼 신재희 김용현 기자 s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