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이 부하 직원에게 씹던 껌을 대신 씹으라고 주는 등 상습적으로 갑질을 해 논란이 됐던 한 업체가 사건 발생 1년이 넘도록 가해자를 징계하지 않아 피해자들의 고통이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7월부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됐지만 현장에서 실효성이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주류 수입업체 노조 관계자는 16일 “특정 부서 전무가 상습적으로 폭언과 욕설, 성희롱해 문제를 제기했지만 아직도 사과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언론 보도, 국정감사 증인채택 등 노조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측을 압박해도 효과가 없다”고 덧붙였다.
노조에 따르면 이 임원은 직원들에게 씹던 껌을 건네며 “너 때문에 단물을 못 느끼겠다. 대신 씹어라”고 했다. 또 길거리에서 머리를 바닥에 박으라고 시켰고, 결혼 후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 직원에게 성희롱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중순 피해자들이 회사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사업주는 오히려 가해자를 감쌌다. 회사 대표가 회의에서 “욕설은 불법이 아니다. 리더십의 일환”이라고 말해 피해자들의 분노를 키웠다. 신고를 받은 노동청은 근로감독을 실시한 뒤 회사 측에 가해자 임원을 징계하라고 시정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회사는 노동청의 시정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과태료 400만원을 납부했다. 회사 노조 관계자는 “노조가 회사와 간부를 대상으로 낸 민사소송이 지난 5일 일부 승소했지만 여전히 사측은 피해자들을 도운 직원에게 인사 불이익을 주는 등 2차 가해를 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회사 관계자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이번 갈등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괴롭힘 건 접수 후 열리는 사내 인사위원회 위원장이 회사 측 관계자로 지정돼 있었다. 회의 자체가 사용자 위주로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애물단지’로 전락한 건 이 회사뿐만이 아니다. 인권단체 직장갑질119가 지난달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0.8%가 ‘법 시행 이후 변한 게 없다’고 답했다. 직장인 A씨는 “팀장이 폭언해 인사팀에 신고했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나를 회유했다”며 “그 사이에 신고 사실을 알게 된 팀장은 나를 더 괴롭혔고 결국 퇴사했다”고 직장갑질119에 제보했다.
전문가들은 관할 부서인 고용노동부의 권한 부족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법 시행 이후 접수된 진정 건수는 지난달 기준으로 1619건이다. 고용부는 이 중 1000여건에 대해 조사를 진행한 뒤 진정 취하 건수(약 500건)를 제외한 나머지에 징계위원회 개최, 사내 문화 개선 등을 권고 조치했다. 그러나 고용부의 해당 권고 조치를 이행한 것으로 확인된 사업장은 전무하다. 고용부 관계자는 “시정 조치 기한이 50~60일이어서 내년 초쯤 기업들의 조치 이행 여부 관련 통계를 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준희 한국경영자총연합회 노동경제연구원 수석위원은 “업체가 끝까지 조치를 이행하지 않아도 고용부는 근로감독이라는 간접적인 수단밖에 없다”며 “그러다 보니 사용자는 가해자 징계 시 각종 부당징계 구제신청에 휘말릴 것을 더 우려해 소극적으로 대응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동청의 권한 확대와 함께 회사의 자의적 징계를 방지하기 위해 징계 기준 및 범위도 법안에 포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규영 기자 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