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클린턴 행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진보적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 UC 버클리 정책대학원 교수는 2년 전 ‘트럼프가 거짓말을 진실로 만드는 10단계’를 분석했다. 라이시 교수는 대표적인 반(反)트럼프 지식인이다.
그가 말한 거짓말이 진실로 바뀌는 10단계는 다음과 같다. ①거짓말을 한다 ②전문가들이 반박한다 ③전문가와 언론을 공격한다 ④많은 이들이 자신의 주장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⑤거짓말은 결국 논란이 된다 ⑥거짓말이 반복된다 ⑦논란은 다시 논쟁이 된다 ⑧트럼프의 말을 믿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된다 ⑨여론조사 결과가 언론에 보도된다 ⑩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핵심은 거짓말, 우기기, 반복, 언론, SNS다.
미국과 트럼프만의 문제일까. 한국사회에 난무하는 선동과 혐오의 말들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말은 명함도 내밀기 힘들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빨갱이’ ‘좌빨’ ‘독재’ ‘대깨문’이라는 덮개가 씌워져 있다. 좌빨은 ‘좌익 빨갱이’의 준말, ‘대깨문’은 ‘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이라는 뜻으로 맹목적인 지지자를 말한다. 야권 정치인과 지지자에게는 ‘토착 왜구’ ‘수꼴’ ‘틀딱충’의 딱지가 붙어 있다. 각각 ‘해방 이후 토착화된 친일파’ ‘수구 꼴보수’ ‘틀니를 딱딱거리는 벌레’라는 의미다.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끼리 서로에게 퍼부을 말인가 싶다.
증오의 말들은 대개 사실이 아니다.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하는 대통령이 빨갱이로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단호한 태도로 북한을 대해야 한다는 야당 정치인이 수구꼴통으로 비난받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북한과의 협상을 강조하는 정치인이 빨갱이로 매도돼서도 안 된다. 비판의 근거가 혐오의 이유가 되면 곤란하다.
야당 정치인들을 ‘토착 왜구’로 믿는 것도 비정상적이다. ‘토착 왜구’라는 말은 한국이 아닌 일본의 국가이익을 위해 정치를 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다. 몇 가지 장면들과 발언을 짜깁기해서 ‘토착 왜구’라는 적대적 논리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일본과의 협력을 강조하기 때문에 ‘토착 왜구’라면,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자는 정치인은 뭐라고 부를 것이며,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자는 정치인은 뭐라고 부를 것인가.
대부분 건전한 시민이 혐오의 말에 무관심한 사이, 비이성적인 비난과 혐오들은 현실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골방에서 내뱉던 말들이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다. 비난과 혐오의 말은 9000개에 달했다는 언론, 유튜브, 카톡, 페이스북, 네이버 밴드 등 SNS와 온라인을 통한 끊임없는 반복되고 확대재생산된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마저 잦은 선동에 노출되다 보면 “정말 그런가”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전형적인 ‘삼인성호’(三人成虎·세 사람이 호랑이를 만든다, 거짓된 말도 여러 번 되풀이하면 진실인 것처럼 여겨진다)다. 세 사람만 떠들어도 없던 호랑이가 나올 판인데, 수천명의 사람이 같은 얘기를 하면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다. 사람의 귀는 의외로 얇다. 반복의 힘, 우기기의 힘, 여론 조작의 힘은 세다. 조직화된 몇백명만 댓글을 달고 페이스북에 올리고 카톡으로 전파하면 여론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런 그룹들이 꽤 있다.
내년 4월 총선이 다가올수록 선동과 혐오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를 제어할 특별한 방법이 없다. 유일한 해결책은 끊임없는 관심이다. 혐오를 비판하는 것, 증오를 반대하는 행동에 관심을 보여야 한다. 극단적인 언어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사람, 증오의 언어가 유달리 많은 사람은 배제해야 한다. 대신 협상과 타협을 강조하는 사람,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을 눈여겨봐야 한다. 주의를 게을리한다면, 어느새 진실을 잠식한 거짓과 증오의 사회만 남게 될 것이다.
남도영 디지털뉴스센터장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