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청이 설치한 지 오래된 스프링클러가 화재에 취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사실상 방치한 것으로 확인됐다. 스프링클러를 작동하는 핵심 부품 ‘임펠러’의 재질 기준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은 게 문제다. 기준이 없다는 허점 때문에 부식이 잘 되지만 값싼 주철로 만든 임펠러가 주로 쓰인다. 녹슨 임펠러 때문에 오래된 아파트나 상가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스프링클러가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임펠러가 원인으로 보이는 화재 사례도 부지기수다.
해외에선 임펠러에 부식되는 재질을 쓰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부도 지난해 이런 문제를 인지하고 해외 기준에 맞춰 관련 고시를 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다. 인명 피해를 부르는 화재 예방에 손 놓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15일 소방청에 따르면 건물용 소방펌프에 장착되는 임펠러의 규격과 관련해 국내 기준은 없다. 임펠러는 화재가 발생하면 소방펌프에서 스프링클러로 물을 보내주는 핵심 부품이다. 잠수함의 프로펠러처럼 회전하며 물을 올려보낸다.
별도 기준이 없기 때문에 저렴한 재질인 주철로 만든 임펠러가 대부분 건물의 소방펌프에 장착돼 있다. 소방펌프는 자주 사용하는 장비가 아니다. 불이 나야 가동되고, 임펠러는 물속에 잠겨 있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임펠러가 부식되는 경우가 생긴다.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일수록 임펠러 부식 확률이 높다. 막상 화재가 났을 때 임펠러 부식으로 스프링클러가 작동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방청 관계자는 “그런 일이 있을까 봐 6개월마다 시험 작동해보고 있다”고 해명했다.
소방청이 연 2회가량 점검한다고 하지만, 모든 ‘경우의 수’를 차단하고 예방하기는 힘들다. 지난 9월 사상자 49명이 발생한 경기 김포시 요양병원 화재에선 스프링클러 미작동으로 피해 규모가 컸었다. 지난 1월 충남 천안시의 한 호텔에서 발생한 화재도 스프링클러 미작동으로 사상자가 20명까지 늘었다. 경기도는 지난해 발생한 화재(9632건) 중 절반 가까이에서 스프링클러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 소방장비업계 관계자는 “노후 건물이었다면 (임펠러 탓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부도 뒤늦게나마 해결에 나섰다. 국가표준원은 지난해 12월 규제개선위원회에서 임펠러를 포함한 15개 기술 규제를 개선하기로 확정했다. 올해 하반기까지 소방펌프 화재안전기준 관련 고시를 고치겠다고 밝혔다. 미국과 일본 중국처럼 임펠러를 포함한 소방펌프 부품에 ‘내식성 소재’(부식에 강한 소재)를 쓰도록 규정하는 내용을 담기로 했다.
그러나 규제 개선을 결정한 뒤로 1년이 지나도록 화재안전기준은 바뀌지 않고 있다. 소방청이 민경욱 자유한국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애초 지난 10월에 개정된 고시가 발령됐어야 한다. 현재 고시 발령은커녕 지난 7~8월 사이 마무리할 예정이었던 규제영향 분석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민의 안전, 재산권 보호 등과 직결된 사안에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소방청 관계자는 “규제영향과 비용편익 분석을 담당하는 인력이 1명뿐이어서 시간이 걸린다. 가능한 한 빨리 진행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세종=신준섭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