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몸살로 자리에 누워 있는데 오랜만에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친구는 근처로 외근을 나왔다면서 한가하면 10분이라도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나는 당장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갑자기 감기에 걸려서 나가기 힘들다고 답했다. 수년간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데 하필 오늘 걸리다니. 전화를 끊고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이 들려는 순간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친구는 우리 집 앞이라면서 감기약만 전해주고 갈 테니 잠깐 문을 열어보라고 했다. 문을 열자 롱패딩을 입은 친구가 서 있었다. 마지막에 만났을 때 단발머리였는데 친구의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 있었다.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집들이 삼아 방문한 이후로 처음이니 1년 만의 만남인 셈이었다. 감기약만 전해주고 가겠다고 한 친구의 양손에는 봉투가 잔뜩 들려 있었다. 전복죽과 귤 한 봉지, 붕어빵, 오뎅.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기억 안 나? 옛날에 네가 내 자취방으로 감기약 사다줬잖아.” 오래전 일이라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고뿔’이란 별명을 지어주었을 정도로 친구가 감기에 자주 걸렸던 건 기억났다. 친구에게 감기를 옮아 같이 앓은 적도 많았다. 잠깐 들어와 차라도 마시고 가라고 했지만 친구는 회사에 빨리 들어가 봐야 한다면서 양손에 든 것을 우리 집 현관문 안에 놓아주고 돌아갔다.
친구가 사다준 따끈한 죽을 먹고 감기약을 입에 털어 넣은 후 다시 자리에 누웠다. 감기약 때문인지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책상과 매트리스, 그리고 비키니옷장이 놓여 있던 친구의 자취방이 떠올랐다. 우리는 오래전 같은 동네에 살았다. 둘 다 첫 직장을 얻은 시기였고 처음으로 집에서 나와 독립한 참이었다. 그토록 원했던 독립이었는데 사람의 온기가 필요했던 걸까. 사는 곳도 직장의 위치도 가까워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은 퇴근 후 만나서 주전부리를 잔뜩 사서 친구 방이나 내 방으로 들어가 밤늦게까지 이야기하다가 헤어지곤 했다. 우리는 서로 감기만 옮긴 게 아니었다. 음악, 책, 영화… 어느 것이건 한쪽이 좋아하면 금세 다른 한쪽도 좋아하게 되었다. 기억의 서랍을 연 것처럼 오래전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불청객처럼 찾아온 감기가 전해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김의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