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사는 외국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 학생이 전입하면 맨 먼저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졌더라도 바로 횡단보도를 건너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운전자들이 신호를 무시하고 달릴 수 있으니 반드시 주위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 “선진국 진입” 운운하는 나라의 시민으로서 불쾌하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얘기다. 하지만 외국인학교가 한국을 일방적으로 깎아내린다고 나무랄 수 없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실시한 ‘보행자 통행 우선권 설문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 7617명 중 5157명(67.7%)이 신호가 있는 횡단보도에서조차 불안함을 느낀다고 답했다. 불안한 이유로는 가장 많은 응답자(2976명)가 ‘신호를 준수하지 않는 차량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횡단보도로 다가오는 차량이 속도를 줄이지 않기 때문’(2854명), ‘차량이 횡단보도 앞 정지선을 넘어서 정차하기 때문’(1857명)이라는 답변이 뒤를 이었다. 신호가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경우 그 비율은 훨씬 높아져 응답자의 83.1%(6326명)가 운전자의 전방주시 태만, 신호 미준수 등으로 불안함을 느낀다고 답했다. 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한국 보행자의 안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 수준이다. 어린이보호구역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지난 9월 충남 아산의 한 어린이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민식(당시 9세)군 이름을 딴 일명 ‘민식이법’이 큰 관심 속에 국회를 통과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민식이법은 어린이보호구역 내 신호등과 과속단속카메라 설치 의무화, 어린이보호구역 내 안전 의무 부주의로 사망이나 상해사고를 일으킨 가해자를 가중처벌하는 내용 등을 담았다. 민식이법은 만시지탄의 감이 있다.
이처럼 거리가 위험한 것은 운전자들이 교통법규 를 지키려는 의지가 약한 게 첫째 원인이다. 외국에서는 속도 제한, 우선 멈춤 등 각종 도로 표지판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사람이 한국에서는 폭주족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에는 교통 당국의 단속 의지 부족과 솜방망이 처벌도 한몫 하고 있다. 정부는 보행자 보호 의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서둘러 법과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사설] 선진국 맞나… 국민 70%가 횡단보도에서 불안
입력 2019-12-13 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