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쪽방서 벗어나니… “내게도 꿈이 생겼어요”

입력 2019-12-12 04:02
경기 포천시의 상가 건물에 사는 주민이 문으로 들어가고 있다(왼쪽). 이 건물에 사는 11살 아이가 엄마, 동생과 함께 쓰는 방. 방한이 되지 않아 아이는 요즘 이불을 뒤집어쓰고 숙제를 한다. 윤성호 기자

쪽방에서 부모, 여동생들과 함께 살던 건희(가명·19)는 지난해 시민단체 도움을 받아 방 3개짜리 임대아파트로 옮겼다. 소심했던 건희 성격은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건희는 “이전에는 사람들이 날 보면 ‘애가 왜 이렇게 풀이 죽었냐’ ‘얼굴이 왜 이렇게 어둡냐’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 오니까 ‘아, 나도 이렇게 바뀔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자신감이 생겼어요”라고 했다. 건희는 “캄캄한 터널에 갇혀 있다가 높은 곳으로 옮겨 온 듯한 감정이 든다”고도 했다.

지난 9월 임세희 서울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팀이 발표한 ‘아동주거빈곤가구의 주거 지원 후 삶의 질 변화’를 보면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벗어난 아동들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확연히 바뀐 모습을 보였다. 임 교수팀은 최저주거기준 미달 아동가구 13곳을 대상으로 주거 개선 효과를 심층조사했다.

좁은 공간에 가족 여러 명과 부대끼며 예민해졌던 아이는 심리적 여유를 찾았다. 자녀 3명을 둔 한 어머니는 “공장 창고 한 칸에 애들 셋이 있다 보니 큰애가 조금만 짜증이 나면 둘째, 셋째를 때렸다. 남매 간 불화가 가장 걱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사 후 각 방이 생긴 남매는 이전보다 훨씬 관계가 좋아졌다.

자신만의 공간이 생긴 아이들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A군(18)은 “방이 생기니 글쓰기처럼 내가 즐길 수 있는 취미가 생기기 시작했다”며 “예전엔 좁고 어두운 집에 있으면 ‘살기 싫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지금은 꿈이 생겨 자격증 공부도 시작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11일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주거 환경은 성장기 아동의 진로 탐색, 가족 관계, 심리적 여유, 생활방식 전체에 영향을 미쳐 성인 이후의 삶도 좌우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임 교수는 주거 지원을 받은 아동과 그렇지 못한 아동 간 ‘진로 탐색 의지 차이’ 비교 연구를 진행 중이다.

전문가들은 주거 지원정책이 제대로 홍보되지 못하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김승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경기아동옹호센터 소장은 “주거복지는 ‘신청주의’라서 대상자가 신청하지 않으면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게 가장 맹점”이라며 “지원 요건이 되는데도 잘 몰라서 도움을 받지 못하는 가구가 무수히 많다”고 설명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수요자들이 복지관을 찾았을 때 직원이 제대로 설명을 못하면 다시는 안 찾는다”며 “전국에 40개밖에 없는 주거복지센터 같은 홍보기관이 더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안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