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낭만에 대하여

입력 2019-12-12 00:05

한 해의 마지막 달도 중순을 넘기고 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2019년의 날들. 만약 이 남은 날짜들을 바라보면서 낭만적인 정서로 가득하다면, 아직은 ‘내 시간을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삶의 여유가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 수능을 마친 학생들은 수시 결과에 따라 정시 준비로 하루는커녕 한 시간도 애태우는 날들일 터이다. 회사원들은 한 해의 성과 정리와 평가로 분주한 시절이고 결과에 따라 내년에 자신의 직업 상황이 달라질 수 있기에 피가 마를 계절이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해.” 다른 별에서 온 어린 왕자는 필시 ‘부적응자’가 되고 말 지구별의 ‘흔한’ 12월 풍경은 숫자로 가득하다. 모두가 평가를 위한 숫자들이다.

수치화돼 평가를 받는 인생이라 해도 그 과정과 결과가 공정하기만 하다면 그래도 버틸 만할 텐데, 그 숫자들조차 조작되고 ‘공정’의 이름으로 포장되는 모습에, 대부분의 성실한 젊은이들이 뛸 의지를 상실하고 있다. 최근 국민들이 참여해 가수들의 데뷔 조를 결정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이미 답을 정해놓고 투표수를 조작했음이 밝혀져 실망감을 줬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불현듯 답이 정해진 줄 모르고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었던 수년 전 청춘들이 기억났다. 이맘때였다. 연말 성과를 바짝 올려야 했던 한 회사가 2주간의 단기인턴을 뽑으면서 약속을 했다. 그 기간 최고의 실적을 낸 사람들에 한해 다음 해 정규직 직원으로 채용하겠다는 공약이었다.

정규직이 되는 숫자보다 안 되는 확률이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그 작은 희망으로 얼마나 열심히 뛰었을지…. 하지만 연말 실적을 모두 챙긴 회사는 ‘적절한 사람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단 한 명도 정규직으로 채용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 ‘답’이 이미 시작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거다. 연말에 바짝 실적을 내야 했던 회사는 딱 2주짜리 인력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찌 솔직하게 공고를 낼 수 있겠나. “우리 회사는 딱 2주간 열정적으로 성과를 내되 최저시급 정도만 받고 일할 사람들을 뽑습니다.” 이렇게 말했다면 추위도 잊은 채 사력을 다해 뛰는 단기인턴은커녕, 지원자 자체도 드물었을 거다.

‘한 인간에게서 돈을 짜내는 정신.’ 근현대 자본주의 정신을 분석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그의 명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자본주의의 에토스를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어떻게 하면 한 인간에게서 최대치의 돈을 짜낼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이미 효율적 방법론을 알고 있고 그 최대치를 실현중인 것 같다.

과로사 아니면 아사, 혹은 사고사밖에 선택지가 없는 청춘들이 이 시스템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굳이 사회학적 개념어나 거창한 이론이 필요 없는 듯하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 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우쿨렐레를 신나게 치며 부르는 청춘들(장혜영, 혜정 자매)의 노래는 잔혹한 현실을 담고 있으나 이에 굴하지 않겠다는 저항성이 함께 담겨 있어 어른의 미안함을 가중시킨다.

1년에 6주 정도 일하면 자신의 기준에서 독립과 생존이 가능하더라며,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력 전부를 사회에 팔지 않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어쩌면 21세기형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에덴형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의 기쁨을 알았던 인간, 자기 본연의 난대로의 재능으로 자기 노동 성격과 분량, 시간을 조절하며 노동과정에서 성장해나갔던 인간, 그런 인간을 만들 수 있는 노동 환경을 지금이라도 상상해보자고 제안한다면, 나는 현실감각 제로인 낭만주의자라고 치부될까.

하지만 용기를 내어 말해본다. 만약 그것이 ‘낭만’이라면 우리 예수님은 그야말로 낭만주의자이셨기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나라, 한 사람도 버리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삶 한가운데서 묵묵히 당당히 살아내셨기에,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들 역시 그러해야 한다고 믿기에, 나는 여전히 낭만을 그린다.

백소영 (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