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이 9일 밤 11시5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연명치료는 하지 않겠다는 고인의 평소 뜻에 따라 자신이 세운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어갔다.
김 전 회장은 한국 기업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일찌감치 해외무대로 눈을 돌려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와 무리한 투자와 분식회계로 대우를 몰락시키고 국가 경제 전체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비판을 함께 받는다.
▒ 500만원
1960년 한성실업에 입사한 김 전 회장은 67년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당시 500만원은 지금 화폐가치로 약 1억6000만원 수준이다. 대우는 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호주 시드니에 해외 지사를 설립했고, 75년에는 종합상사 시대를 열었다. 대우는 창업 5년 만에 수출 100만 달러를 달성했다. 70년대에는 중동붐을 타고 회사를 급격하게 성장시켰으며, 70년대 후반에는 현대그룹, 삼성그룹, 럭키그룹(현 LG그룹)에 이어 재계 4위에 도약했다. 대우는 76년 한국기계(대우중공업), 78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대한조선공사(대우조선해양) 등을 인수하며 중화학산업으로 몸집을 키워나갔다.
▒ 세계경영
과거 대우에 근무했던 한 대기업 임원은 10일 “동양인이 해외에서 푸대접받던 시절에도 대우맨들은 위상이 달랐다”며 “한국인으로, 대우맨으로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은 당시 한국 기업 문화에선 남다른 시야를 가진 비전이었다. 김 전 회장은 90년대에는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 동유럽을 거점으로 삼고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했다. 김 전 회장은 1년 중 280일을 해외에 체류할 정도로 해외 경영 활동에 매진했다. 대우의 해외고용인력은 93년 2만2000명에서 98년 15만2000명으로 늘었다. 98년 대우의 수출액은 186억달러로 당시 우리나라 수출총액 1323억달러 중 약 14%나 됐다. 89년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을 출간했고, 6개월 만에 100만부가 팔리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 IMF
대우그룹은 99년 해체 직전 41개 계열사, 600여개의 해외 법인·지사망을 거느렸다. 대우실업에서 시작한 지 30여년 만에 현대그룹에 이어 재계 2위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대우그룹의 몰락은 IMF와 함께 찾아왔다. 투자를 통한 몸집 불리기에만 주력했던 대우그룹은 400%가 넘는 부채 비율, 구조조정을 등한시 한 무리한 확장이 문제가 됐다. 당시 정부는 기업의 부채비율을 200% 아래로 내리도록 했지만, 대우그룹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적인 투자로 일관했다. 98년 3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오른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내세우며 성장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는 오히려 김대중정부와 대립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98년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표류하고, 금융 당국이 기업어음·회사채 발행 제한을 가하자 대우는 급격하게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결국 대우그룹은 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해체됐다. 당시 부채 규모는 500억 달러였다. 그해 11월 1일 김 전 회장은 13명의 그룹 사장단과 함께 경영포기를 선언하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대마불사 신화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룹은 끝내 해체됐고 현재 회사 이름에 대우가 들어가는 곳은 대우건설, 위니아대우(옛 대우전자), 대우조선해양(옛 대우중공업 조선해양부문), 미래에셋대우(옛 대우증권) 등에 불과하다.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 김현중 한화건설 전 부회장, 바이오리더스 박영철 회장, 아주그룹 이태용 부회장 등을 비롯한 대우맨들은 여러 기업에서 활약하고 있다.
▒ 베트남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로 2006년 징역 8년6개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대우그룹 분식회계 규모는 97년 19조원, 98년 21조원에 달했다. 대우그룹의 분식회계 규모는 전 세계 기업을 통틀어 가장 많은 금액이다.
사면 이후 김 전 회장은 말년을 베트남에서 주로 보냈다. 베트남에서 골프에 매진하던 그는 베트남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취업대란에 시달리는 한국 청년들을 위해 청년 양성가 계획(GYBM)을 구상했다.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GYBM 프로그램은 해외청년취업·창업 분야에서 사실상 선구자다. 김 전 회장은 한국에서 투병에 들어간 2017년 말 이전까지 번찌 골프장에 머물면서 GYBM의 성공 안착을 위해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다. 대우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은 청년들의 해외진출을 돕는 GYBM 교육사업의 발전적 계승과 함께 연수생들이 현지 취업을 넘어 창업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체계화해줄 것을 유지(遺志)로 남겼다”고 밝혔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