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대기업에서 업무집행을 결정하는 이사회가 여전히 ‘거수기’에 머물고 있다. 사외이사 비중이 늘고 이사회 내 보상위원회, 내부거래위원회 등 각종 기구의 설치 비율이 증가하는 등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서 긍정적 흐름은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사회에 상정된 안건 100건 가운데 99건은 원안대로 ‘패스’하는 게 현실이다.
또 총수 일가의 이사 등재 회사 비율이 최근 몇 년 새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책임경영에 많은 한계를 보인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정거래위원회는 9일 이러한 내용을 골자로 하는 ‘공시대상 기업집단 지배구조 현황’을 공개했다. 대상은 올해 지정된 56개 공시대상 기업집단(자산 5조원 이상)에 소속된 1801개 기업이다. 이 가운데 250개 상장사의 사외이사는 810명으로 상법 등에 따라 선임해야 하는 사외이사 숫자보다 85명이나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사회에서 사외이사 비중은 51.3%에 이르렀다. 처음으로 50%를 넘은 2016년 이후 사외이사 비중은 계속 늘고 있다. 사외이사의 이사회 참석률도 95%로 상당히 높다.
문제는 이사회가 회사의 중요 의사결정 등 법에 보장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지에서 발생한다. 지난해 5월부터 올해 5월까지 1년간 250개 상장사의 이사회 안건 6722건 가운데 99.6%(6698건)는 원안대로 가결됐다. 사외이사 반대 등으로 원안대로 통과되지 않은 안건은 0.4%(24건)에 그쳤다. 그중에서도 부결된 안건은 3건뿐이었다. 원안대로 통과되지 않은 안건의 비중은 총수 있는 기업집단(0.2%)보다 총수 없는 기업집단(2.2%)에서 더 높게 나타났다.
특히 이사회 안건 가운데 공정거래법에 규정된 50억원 이상의 대규모 내부거래 관련 안건 755건은 모두 원안대로 통과됐다. 공정위가 총수 일가 사익편취 규제 대상으로 정한 상장사에서도 이사회 원안 가결률은 100%였다. 정창욱 공정위 기업집단정책과장은 “대규모 내부거래 안건과 관련된 의사결정이 형식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후에라도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실제 경영활동을 하고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이사회에 등재하지 않는 총수 일가의 ‘그림자 경영’은 더 심해졌다. 공정위가 최근 5년간 연속 분석 대상으로 지정한 21개 기업집단 총수 일가의 이사 등재 비율을 보면 올해 총수 일가가 1명 이상 이사로 등재된 회사의 비율은 14.3%에 불과했다. 이 비율은 2015년 18.4%였다. 총수 본인이 이사로 등재된 회사도 2015년 5.4%에서 올해 4.7%로 줄었다.
10개 기업집단(한화, 신세계, CJ, 미래에셋, 태광, 삼천리, 이랜드, 네이버, 동국제강, DB)의 경우 총수는 물론 총수 2·3세도 이사로 등재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정 과장은 “총수 일가가 경영활동을 하면서도 상법상 손해배상책임 등에서 벗어나려는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한편 소액주주의 주주권 행사를 위해 도입한 전자투표제, 집중투표제, 서면투표제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자투표제의 경우 전체 상장사에서 34.4%가 도입했지만 전자투표제 방식으로 의결권을 행사한 비율은 2.0%에 그쳤다. 4.4%가 도입한 집중투표제는 아예 시행되지도 않았다.
세종=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