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화교들의 예배 공동체인 서울 중구 ‘여한 한성중화기독교회’(한성교회)가 107년 역사를 조명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지난 6일 일반에 공개했다. 여한(旅韓)은 한국에 머무는 나그네라는 뜻이다. 교회는 서울시 정동역사재생지원센터가 주관한 정동 역사 재생활성화지역 주민공모사업에 선정돼 이번 사업을 진행했다.
전시 패널은 교회 진입로 벽면에 설치해 정동을 찾은 이들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패널에는 교회의 출발부터 지금까지의 여정을 담았다. 교회가 배출한 교인들의 이야기와 교회를 도왔던 한국인 목회자들의 면면도 볼 수 있다.
교회는 1912년 중국인 청년 처다오신(車道心)과 미국인 CS 데밍 선교사가 경성YMCA에서 화교를 위한 집회를 열면서 시작됐다. 처다오신은 훗날 한성교회 장로가 된다. 교회는 58년 지금의 정동길 8번지로 이전했다.
교회는 우리나라 화교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화교들은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 군대를 따라 인천에 들어온 상인들의 후예다. 이후 서양 선교사들이 이들을 선교 대상으로 주목하면서 화교 예배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처 장로는 중국 산둥성에서 헌터 코벳 선교사가 설립한 교회에 출석하다 1898년 아버지의 박해를 피해 조선으로 이주했다. 중국에서 배운 한의학을 바탕으로 한의원을 차리고 HG 언더우드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에 출석했다. 한의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처 장로는 데밍 선교사를 만나 교회를 세웠다.
화교 건축가인 왕공원(王公溫) 장로도 교회가 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왕 장로는 처 장로와 1920년 복음건축창을 세운 뒤 수익금과 지분을 교회에 헌금했다. 복음건축창은 경성성서신학원(1921) 이화여대 프라이홀(1923)·음악당(1935) 조선기독교서회(1931) 등을 건축한 당대 최고의 건축회사였다.
시련도 많았다. 화교 교회다 보니 국제정세의 변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31년 7월 중국 지린성 창춘현 만보산 지역에서 일제의 공작으로 조선과 중국 농민들 사이에 촉발된 유혈사태인 만보산 사건과 37년 중일전쟁 등으로 한성교회는 큰 어려움에 빠졌다. 조선인과의 갈등이 커졌기 때문이다. 당시 교인과 목회자 상당수가 중국으로 돌아가며 교세가 급속도로 감소했다.
6·25전쟁 후에는 한국인 목회자들이 재건된 교회의 안정을 도왔다. 중국 선교사였던 방지일 목사를 비롯해 정진경 목사 등이 중화기독교회의 재건에 힘을 보탰다. 92년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를 맺었을 때도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활용했다. 교회는 중국 선교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고 중국선교사훈련원을 설립해 선교사를 키웠다. 중국에서 유입되는 이민자들의 한국 정착도 지원했다.
유전명 한성교회 원로목사는 9일 “교회의 역사를 소개하는 공간을 통해 서울 한복판에 화교들의 신앙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면서 “새로운 100년 동안 나그네 교회로 중국과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글·사진=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