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6·25전쟁 70주년을 맞는다. 전란기는 이단 성장의 최적기였다. 특히 피난지 부산은 이단 발흥의 최적지였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피난민이 불확실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교회와 이단은 상반된 모습을 노출했다.
교회는 밖으로 전쟁의 불안정성 가운데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한편, 안으로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문제로 인해 분열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장로교는 마침내 1952년 고려파, 1953년 기독교장로회로 분립을 경험한다.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가 절박했던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분열을 거듭하는 교회에 대한 불신은 깊어갔다.
반면 이단들은 전쟁으로 기회를 맞았다. 첫째, 지리적인 면에서 강력한 교권의 그늘 아래 숨죽이며 활동했던 서북 지역과 달리, 동남단 불교의 땅 부산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했다. 지금도 불자가 다수인 부산 지역에선 이단 문제가 교회 안 밥그릇 싸움 정도로 비치고 있다. 이로 인해 이단과 정통의 구분이 효과적인 구속력을 갖기 힘든 상황이다.
둘째, 심리적인 면에서 안정적 교권이 실재했던 서북 지역이나 정치문화의 중심인 서울에 비해, 혼란과 불안의 임시 거처 피난민들에게는 내세의 축복을 강조하며 분열하던 교회보다, 임박한 종말과 지상천국을 주장하는 이단들의 감언이설이 오히려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피난민들의 공허함과 애통함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이단들의 타이밍은 절묘했다.
셋째, 신앙적인 면에서도 전쟁 상황은 이단 포교의 옥토였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찬송가 515장 ‘눈을 들어 하늘 보라’는 1952년 부산에서 석진영 작사와 박재훈 작곡으로 만들어진 찬송이다. 피난 기독교인들은 이 찬송을 눈물로 부르며 탄식했다. 이단들은 이런 기독교인들에게 기성 교회의 한계와 부족함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친밀하게 다가왔다.
주목할 점은 사회적 혼란기에 나타나는 비성경적 종말론이 전쟁 시기에도 기승을 부렸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시한부 종말론은 사회적 혼란기 혹은 전환기에 어김없이 등장했으며, 한국전쟁 시기에도 물론 다수 등장했다. 이후 민주화와 밀레니엄의 사회적 전환기에도 마찬가지였다. 92년 다미선교회의 휴거 소동, 88년 99년 2012년 하나님의교회의 반복적 시한부 종말론, 신천지의 14만4000명 조건부 종말론이 혹세무민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시한부 종말론은 실패해도, 이단들의 영향력은 계속된다는 점이다. 종말을 주장하던 하나님의교회는 종말이 온다던 2012년 한 해 동안 전국 30여곳에 건물을 매입하며 재산을 증식했고, 신천지는 14만4000명의 조건이 충족됐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국내 곳곳의 부동산 매입에 집중하는 모순적 행태를 보였다. 성경은 물론이고 자신이 과거에 주장했던 교리마저도 언제든지 변개할 수 있는 교주의 존재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거짓 종말론이 실패하고 신도들과 가족들은 고통당해도, 이단 지도자들은 부자가 되는 이율 배반의 블랙코미디가 반복돼 온 것이다.
이단들에 소속된 신도들은 비성경적 종말론이 실패해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성경적이고 비상식적인 종말론을 선택했던 이들에게 불발된 시한부 종말론을 인정하는 순간은 곧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사실을 시인해야만 하는 참담한 순간이다. 이를 모면하기 위해 종말론의 실패를 스스로 합리화하는 과정으로 들어섰다.
현대 이단 발흥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앞둔 오늘,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전단과 설문지를 들고 ‘종말을 파는’ 이단의 폐해와 다양한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는 ‘종말을 잊은 교회’의 일탈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탁지일(부산장신대 교수·현대종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