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장관 내정 추미애, 강인한 이미지에 추진력 강해

입력 2019-12-06 04:05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7월 여야 대표들을 청와대 상춘재로 초청했을 때 추미애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환담하는 모습. 5일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추 의원은 ‘대통령이 전한 메시지가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따로 없더라도 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답했다. 뉴시스

차기 법무부 장관으로 낙점된 추미애 후보자는 정치권에서 ‘추다르크(추미애+잔 다르크)’로 불릴 정도로 강한 이미지와 추진력을 갖고 있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은 ‘검찰과의 전면전’이 선포된 상황에서 추 후보자의 이런 이미지가 더욱 진가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추 후보자의 정치 이력은 남다르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10년간 판사로 지낸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다. 15대 총선에서 여성으로서는 첫 판사 출신 국회의원이 된 뒤, 5선 의원의 길을 걸어 왔다.

추 후보자는 1958년 대구의 한 세탁소 가게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떠나 외가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는 한양대 법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해, 82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로 판사의 길을 걸었다.

추 후보자는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추 후보자를 영입하며 “세탁소집 둘째 딸이 부정부패한 정치판을 세탁하러 왔다”고 말했다. 15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을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당시 38세 여성이라는 점과 판사 이력, 고향이 대구인 점 등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추 후보자를 ‘대구의 딸이자 호남의 며느리’라고 불렀다.

특히 추 후보자는 자신이 먼저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대학 동기인 남편 서성환 변호사를 뒷바라지해 합격시킨 일화로도 유명하다. 영남 출신인 추 후보자와 달리 남편은 전북 정읍 출신이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해 집안의 반대가 만만찮았지만 결국 둘은 7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그가 추다르크라는 별명을 얻은 건 97년 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 캠프의 유세단장을 맡으면서다. 당시 추 후보자는 야권의 불모지인 대구에서 활약하며 정치권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재선에도 성공한 추 후보자는 당시 새천년민주당 김대중 총재 비서실장, 최고위원 등 당에서 굵직한 역할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2002년 16대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 캠프에서 국민참여운동본부 공동본부장으로 일하며 희망돼지 저금통 사업을 이끌었다.

추 후보자는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 사태 때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남아 이듬해 노 전 대통령의 탄핵안 통과에 찬성한 일로 역풍을 맞는 등 정치 인생의 전환기를 겪기도 했다. 추 후보자는 당시 탄핵에 찬성했던 것이 정치인생 중 가장 큰 실수라고 밝힌 바 있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부결된 뒤 그는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2박3일 동안 광주 금남로에서 5·18 망월동 묘역까지 15㎞를 삼보일배하며 국민에게 사죄했지만, 끝내 17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하지만 18대 총선에서 재기에 성공했고, 이후 연이어 당선되며 ‘여성 첫 지역구 5선’ 고지에 오르게 된다.

추 후보자는 2016년 민주당 대표 자리에 오르면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당시 친문재인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당선된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을 거쳐 19대 대선, 6·13 지방선거 등 두 차례 선거를 모두 압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추 후보자는 지방선거를 2~3개월 앞두고 발생한 ‘미투 국면’에서 위기관리 능력이 빛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안희정 전 충남지사 수행비서인 김지은씨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논란이 커지자, 폭로 당일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소집해 안 전 지사에 대해 출당 및 제명 조치를 취했다.

다만 여권 일각에선 추 후보자가 종종 어떤 사안에 대해선 지나치게 소신을 강조해 당청과의 관계가 삐걱거릴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신재희 박재현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