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트콤 같았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가 4일(현지시간) 막을 내렸다. 서방 최대 안보동맹체가 창설 70주년을 맞았다는 기념비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회의가 열린 이틀 내내 파열음을 일으키며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동맹의 가치를 돈으로만 환산해 방위비 인상을 압박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동맹체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회의 첫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날선 신경전을 벌였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은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발단은 방송 카메라에 포착된 일부 국가 정상들의 ‘트럼프 뒷담화’ 장면이었다.
영상을 보면 전날 영국 버킹엄궁 저녁 기념행사 자리에서 ‘트럼프 절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마크롱 대통령을 향해 피식 웃으며 “그게 당신이 늦은 이유냐”고 묻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끼어들어 “최고이신 분이 항상 40분짜리 기자회견을 하기 때문에 늦은 것이다. 40분짜리!”라고 대신 답한다. 타국 정상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는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를 비꼰 것이다.
트뤼도 총리는 턱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처럼 손짓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그걸 발표했을 때 그의 팀원들 입이 떡 벌어지는 것을 봤냐”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내년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미 대통령 전용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연다고 갑자기 발표하자 보좌진이 당황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함께 있던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딸 앤 공주도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이 대상자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외신들은 ‘최고이신 분’ 등의 표현을 들어 뒷담화의 대상을 트럼프 대통령으로 특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뤼도 총리를 향해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라는 표현을 써가며 뒤끝을 드러냈다. 그는 “트뤼도는 멋진 남자지만 내가 캐나다의 방위비 지출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2%가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자 기분이 나빠진 것 같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수모는 이어졌다. 앤 공주가 어머니의 나무라는 눈길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트럼프 대통령과의 악수를 거부하는 듯한 모습이 담긴 영상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방위비 인상 압박은 이번 나토 회의에서 모든 이슈를 잡아먹는 블랙홀이었다. 런던에 도착하기 전부터 “미국인들을 위해 싸우겠다”고 공언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나토 동맹국들이 GDP 대비 방위비 비율을 2024년까지 2%대로 늘리겠다고 약속한 상황임에도 “4%는 돼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증액을 요구했다. 무역 보복에 나서겠다는 위협도 했다.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공동 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공동선언문에 명시하는 등 구소련을 대체하는 새 견제 대상을 설정하며 안보동맹체로서의 결속을 다지는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 업체 화웨이 제재에 대해 엇갈린 입장을 나타내며 불협화음을 예고했다. 미국은 스파이 행위에 악용될 수 있다며 화웨이 장비를 이용하지 말라고 촉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절친인 존슨 총리가 “해외로부터 들어오는 투자에 불필요하게 적대적이고 싶지 않다”고 발언하는 등 나토 회원국들은 ‘무조건 동참’과는 거리가 있는 반응을 보였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