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옮겨가며 원하는 공부… 부천시 모든 고교는 ‘우리 학교’

입력 2019-12-06 04:03 수정 2019-12-06 14:44
경기도 부천 부명·중흥·계남고 학생들이 지난달 27일 부명고 화학교실에서 용액이 묻어 색이 변한 리트머스 시험지를 오려 모자이크를 완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부천시에서는 ‘모든 고교가’ ‘모든 학생들이’ ‘모든 교실에서’란 슬로건을 내걸고 클러스터 형태로 학교들이 연합해 공동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오후 4시 경기도 부천의 중흥고. 2학년 유진이는 6교시를 마치는 종이 울리자 재빨리 짐을 챙겨 단짝인 예슬이와 학교를 나섰다. 학교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80번 버스를 타고 순천향대학병원 정류장까지 15분가량 이동했다. 평소에는 버스에서 내리면 편의점에서 간식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게 일상이다. 이날은 6교시에 학교 운동시합에서 탄 상금을 모아 피자 파티를 했기 때문에 편의점은 거르기로 했다.

유진이가 향한 곳은 부명고 화학교실이다. 교실로 들어서자 부명고에 다니는 중학교 동창들이 웃으며 맞는다. 유진이는 올해 1학기부터 매주 수요일 이 학교에서 이뤄지는 화학실험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화학에 매료돼 있는 유진이는 화학 관련 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싶다. 대학에서도 화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그래서 유진이는 늘 다양한 화학 수업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특히 이론으로 배운 화학 지식을 실험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기회를 갖고 싶어 했다. 자기 학교에 개설되지 않은 실험 수업이 부명고에 만들어지자 주저 없이 지원했다.

유진이가 화학실험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부천의 학교들이 클러스터 형태로 진화하고 있어서다. 부천시에서는 ‘모든 고교가’ ‘모든 학생들이’ ‘모든 교실에서’란 슬로건을 내걸고 학교들이 연합해 공동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인구밀도가 높고 학교 간 이동거리가 짧으며 대중교통이 발달해 있는 지역 특성을 십분 활용했다.

예를 들어 부명고의 화학실험 수업에 중흥고 학생이 참여하고, 중흥고의 융합과학 탐구 수업을 부명고 학생들이 듣는다. 부천의 고교들이 공동으로 학생을 대상으로 수요 조사를 벌여 취합한 뒤 학교들이 나눠서 수업을 개설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지난달 27일 부명고 화학실험 수업에서는 산성과 염기성 용액을 늘어놓고 리트머스 시험지의 색깔 변화를 실험했다. 용액이 묻어 색이 변한 리트머스 시험지를 오려 모자이크를 완성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수업은 오후 5시에서 6시50분으로 짧지 않다. 부명고, 중흥고, 계남고 학생 20여명이 모인 수업이다. 강사가 다른 모둠(조)을 지도하고 있어도 수업 태도는 흐트러지지 않고 모자이크를 완성하는 데 몰입했다.

강사와 학생들은 집중력이 높아진다는 반응이다.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수업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찾아와 듣는 소중한 수업 시간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열의를 가지고 참여하기 때문에 교사는 허투루 수업을 준비할 수 없다. 오히려 교사가 학생에게 에너지를 받아 열의를 가지고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하니 학생들은 더욱 귀를 쫑긋하게 된다. 일종의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는 셈이다.

부명고 화학실험 수업을 담당하는 유경선(31) 강사는 “여러 학교 학생들이 모이다보니 초반에는 다소 서먹한 부분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화학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어서 수업 분위기가 좋다”고 소개했다. 부명고 2학년 최태영군은 “자동차 엔진에 관심이 많고 그쪽으로 진로를 잡고 있는 저에게는 의미 있는 수업”이라고 했다. 이어 “자동차 엔진이 고출력을 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열기를 견뎌야 한다. 이에 맞는 재료를 찾아내는 것도 엔지니어의 일이다. 그래서 화학 과목은 제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에탄올 실험에서 치마에 불붙은 일화를 꺼내려 하자, 유 강사가 “위험한 실험이 절대 아니었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만족도 조사도 긍정적이었다. 화학실험 수업은 수업의 질 부문에서 ‘매우 만족’ 62%, ‘만족’ 24%로 조사됐다. 불만족 응답은 없었다. 수업을 담당하는 강사에 대한 만족도는 95%(매우 만족 86%, 만족 9%)였다. 부명고는 기초디자인 수업도 클러스터형 수업으로 개설하고 있다. 이 수업은 만족도 100%였다.


교육부에 따르면 올해 부천에서 클러스터형 수업을 개설한 학교는 26곳이고 학생 656명이 참여한다. 직업계고와 특수목적고도 동참해 제과(부천정보산업고), 바이오화학제품제조(부천공고), 바텐더(경기국제통상고) 같은 일반고에서 개설하기 힘든 수업을 공유하고 있다. 부천여고에서 진행하는 보건간호 수업의 경우 9개 고교에서 20명, 경기예술고의 기초디자인 수업은 9개 학교에서 18명이 모였다. 부천여고 수업은 자교 학생이 7명, 경기예고 수업은 3명이다.

부천의 실험이 주목받는 이유는 2025년 3월 도입 예정인 고교학점제 때문이다. 고교학점제는 고교생이 대학생처럼 수강 과목을 선택해 학점을 취득해 졸업하는 제도다. 대학에서는 학점이 취업에 활용되지만 고교 학점은 대입에 쓰인다. 고교학점제를 시작하려면 지역이나 학교 상관없이 학생이 접근 가능한 수업의 종류와 수가 엇비슷해야 한다. 그러나 학교 입장에서 학생 1~2명이 요구하는 수업에까지 강사를 고용할 수는 없다. 정부가 클러스터형 수업을 ‘도시형 모델’로 검토하는 이유다.

갈 길은 아직 멀다. 고교들이 학사 일정을 맞추는 작업부터 만만치 않다. 부천 클러스터형 수업은 7교시가 없는 수요일 저녁에만 이뤄진다. 따라서 학생 1인당 수업 1개만 참여 가능하다. 만약 학교마다 정기고사 일정이 다를 경우 수업 날짜를 조정해야 한다. 또 고교 2학년만 참여할 수 있다. 현행 국가교육과정에 따라 고1 때는 문·이과 구분 없는 공통과목을 배우고 2학년부터 선택형 수업을 받는다. 3학년은 대학입시 때문에 사실상 어렵다. 클러스터형 수업이 더욱 활성화되려면 고교들이 지금보다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하고, 교육 당국의 행정·재정적 지원도 강화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지난 4일 오후 부명고를 방문해 학생과 학부모, 교사에게 각별한 지원을 약속했다. 유 부총리는 “다양한 과목 선택권 보장은 고교학점제 도입에 필수”라며 “학생 한 명 한 명을 위한 지역 내 협력 모델 활성화를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부천=글·사진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