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창간 때부터 5년여간 지국장을 하며 문서선교에 헌신한 고 정용기 목사는 3대 목회자 가정이었다. 부친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했다가 후유증으로 숨진 정찬성 목사다. 아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순복음교단에서 교역자로 섬기고 있다.
정용기 목사는 1988년 국민일보 창간과 함께 충주지국 초대 지국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그곳 순복음문화교회 담임목사였다. 정용기 목사의 아들 정회승(순복음강북교회 부교역자) 목사는 지난달 서울 동대문구 교회 앞 카페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아버지의 문서선교 열정이 생생히 기억난다”며 “늘 국민일보 점퍼를 입고 교회마다 찾아다니며 문서 선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국민일보를 홍보했다”고 말했다.
정용기 목사는 1989년 국민일보 창간 1주년 때 독자 확장 공로로 국민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그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충주지방회장과 충주시기독교연합회장도 지냈다.
정용기 목사의 부친 정찬성 목사는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다 겪은 고초 때문에 병을 얻어 별세했다. 정찬성 목사는 충북 청주와 충주, 대전 신탄진 등에 있는 형무소로 이송되며 온갖 고문을 당했다. 해방 후엔 신탄진에서 복음을 전하다 6·25전쟁으로 북한군에 잡혀 생사의 위기를 넘나들었다. 북한군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 놓아주겠다고 했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북한군은 예수 믿는 사람만 따로 모아 놓고 총을 난사했다. 정찬성 목사가 기도하느라 고개를 숙였을 때 머리 위로 총알이 스쳐 지나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이후 충청권에서 여러 교회를 개척해 사역했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거부해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의 후유증인 복막염으로 1957년 4월 별세했다.
정용기 목사도 주로 충청권에서 사역했다. 2001년엔 충남 공주 순복음탄천교회로 임지를 옮겼다. 5년여간 헌신적으로 일했고 2016년 대장암이 발견됐다. 정회승 목사는 투병 중에도 새벽기도회에 나가 한국교회, 순복음탄천교회,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한편으로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그런데 정작 입술로는 ‘모두 주님의 은혜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더라”면서 “아버지는 2년 후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소천하셨다”고 전했다.
정용기 목사가 지난해 별세한 후 사모인 김진영 전도사가 교회 강단을 지키고 있다. 순복음탄천교회 성도들이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며 떠나려는 사모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사모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 교단의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정회승 목사는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아버지가 참 목자의 모델이었는데 이제는 어머니로부터 큰 도전을 받고 있다”고 했다.
“최근 어머니가 예배당을 도배하시겠다고 해서 교회 형편을 생각해 천천히 하시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내가 기도하면서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나중에 들었는데 1년에 한 교회씩 무료로 도배를 해주는 부부를 만나셨대요. 하나님의 일은 돈으로 하는 게 아니구나 깨닫게 됐죠.”
정회승 목사는 한세대 신학과와 영산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2007년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역자로 섬기다 순복음강북교회로 옮겼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풀러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를 마쳤다. 그는 ‘아침을 여는 찬양/ 매일 건반 기도’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큐티를 위한 찬양 반주 영상을 올린다. 정회승 목사는 “음악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개척교회 목회자의 아들로 찬양 반주를 하면서 찬송가를 편곡하고 영감 있게 연주하는 재능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정회승 목사는 “여러모로 부족한 자를 목회자로 부르시고 특별히 순복음강북교회 전호윤 목사님을 담임으로 섬기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이 모든 것이 올곧게 신앙을 지킨 조부, 문서선교에 헌신하신 부친을 통해 받은 특별한 은혜”라고 말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