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저물가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든 물가 요인을 포괄해서 보여주는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터’(GDP물가)는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4분기부터 4분기 연속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했다. 3분기 GDP물가는 외환위기 이후 2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치까지 떨어졌다.
GDP물가 하락은 ‘기업 채산성 악화→투자·고용 부진→가계 구매력 추락’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작동시킬 수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폭락한 수출품 가격은 가계의 생존마저 위협한다. 수익성에 ‘경고등’이 켜진 수출기업은 투자·고용을 줄여 살길 찾기에 바쁘다. 저물가 장기화의 끝이 보이지 않아 ‘디플레이션(장기 물가 하락에 따른 경기 침체) 우려’마저 키운다. 내수 침체라는 우울한 결말을 부를 수 있다는 위기감이 높아진다.
한국은행은 3분기에 GDP 디플레이터 상승률이 전년 동기 대비 -1.6%에 그쳤다고 3일 밝혔다. 1999년 2분기(-2.7%) 이후 2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치다. 지난해 4분기(-0.1%)부터 4분기 연속으로 하락세를 면치 못하면서 ‘역대 최장’ 마이너스 물가행진을 보였다.
GDP물가로도 불리는 GDP 디플레이터는 명목GDP를 실질GDP로 나눈 값이다. 이 값이 마이너스라는 건 물가를 반영한 실질GDP가 명목GDP를 밑돈다는 걸 의미한다. 저물가가 길어질수록 GDP 디플레이터가 반등할 여지도 좁아진다.
GDP물가 하락은 소비를 담당하는 가계의 구매력 감소로 직결되기에 심각하다. 한은은 국내 주력 수출품의 가격 하락이 GDP물가를 끌어내렸다고 설명한다. 수출품 가격이 하락하면 수출기업의 영업이익이 감소한다. 사정이 나빠진 기업은 투자·고용을 줄이고, 노동소득에 기대는 가계의 구매력 저하로 이어진다. 한은은 “GDP 디플레이터가 떨어질수록 가계에 돌아가는 ‘파이’가 감소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고 했다.
수출품 가격 하락의 이면에는 미·중 무역분쟁,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자리한다.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신규 수주량을 줄인 탓에 국내 주력 수출품의 가격이 떨어졌다. 특히 올해 들어 반도체·디스플레이·철강·석유화학의 동반 부진이 길어지고 있다. 올해 3분기 수출 디플레이터는 -6.7%로 1분기(-2.5%)나 2분기(-2.0%)보다 낙폭이 컸다.
더 큰 문제는 GDP물가의 마이너스 행진에 ‘브레이크’가 없다는 점이다. 저성장·저물가가 고착돼 내수 경기는 반등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글로벌 불황은 한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한은 관계자는 “디플레이터가 갑자기 플러스(+)로 전환되기 힘들 것 같다. 5분기 연속 마이너스도 염두에 둬야 할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한은은 디플레이션 우려에 거듭 선을 그었다. 내수 디플레이터가 여전히 1%대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아직 총수요는 양호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전문가들 시각은 다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총수요에는 수출과 내수 모두 포함되는데 내수 디플레이터만으로 디플레이션을 부정하는 것은 논리에 어긋난다. 반도체 가격 같은 외부 변수 탓만 하기엔 GDP 디플레이터 하락이 벌써 1년째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3분기 경제성장률은 지난 10월 속보치와 같은 0.4%로 잠정 집계됐다. 한은은 연간 2.0% 달성 가능성에 대해 “정부의 재정 집행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봐야 한다”며 확답을 피했다.
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