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낙 별나다 보니, 워싱턴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황당한 시나리오들이 난무한다. 이런 얘기들을 옮기는 사람들이 멀쩡한 지식인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트럼프 시대의 불확실성과 불안감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이다.
얼마 전 만났던 미국 정치학 교수도 믿기 힘든 가설을 꺼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11월 3일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할 것이며, 혼란 속에 대선이 새로 치러질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고 전했다. 기가 차서 ‘그게 말이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나도 처음에는 믿기질 않았는데, 트럼프라는 사람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고 답했다. 이어 “트럼프는 그렇게 하면 자신이 역사에 영웅으로 기록될 것으로 믿는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진지한 표정과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얘기는 기묘한 대조를 이뤘다.
워싱턴의 싱크탱크 관계자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그는 “상원을 여당인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어 트럼프가 탄핵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실제로 탄핵돼도 트럼프가 백악관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고 비밀스레 말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실제로 탄핵된 대통령이 없다는 점을 가장 우려했다. 워터게이트로 탄핵 직전까지 몰렸던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사임을 택했다. 그는 “미국 헌법이 탄핵 절차를 규정하고 있지만, 탄핵된 대통령이 절차상 문제를 물고 늘어지면서 이의를 제기할 경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률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 대한 법률상 허점을 트럼프가 파고 들어갈 것이라는 얘기였다. 트럼프가 재선 임기를 마친 뒤 장녀인 이방카를 다음 대통령으로 만들어 ‘트럼프 왕조’를 꿈꾼다는 것은 이제 뉴스 축에도 들지 못한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 정치는 한국 정치만큼이나 어지럽다. 야당인 민주당은 속도전을 펼쳐 올해 크리스마스 전에 트럼프 탄핵에 대한 하원 표결을 마치겠다는 시간표를 내놓았다. 이렇게 될 경우 내년 초 상원에서 트럼프 탄핵안에 대한 본격적인 심리가 진행된다. 미국 대선과 탄핵이 맞물려 돌아간다면 지금도 럭비공 같은 트럼프가 어떤 맞불카드를 내놓을지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다.
여기에다 내년 4월에는 한국 총선이 있다. 포용력 없는 여당과 융통성 없는 야당의 정면충돌이 벌어질 것이다. 촛불과 태극기로 불리는 국론분열은 더욱 심화될 우려가 크다. 북한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북한이 미국에 ‘새로운 계산법’을 요구한 시한은 올해 말이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인위적으로 정한 데드라인”이라며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북한이 연말 이후 그동안 유예했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를 재개할 수 있다는 불길한 전망은 그래서 나온다. 단거리 미사일 발사에 면죄부를 줬던 트럼프가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에 눈감아줄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한·미 사이에는 방위비 분담금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 주한미군 감축이 더 이상 엄포로만 들리지 않는다.
지금 남북한과 미국의 3자 관계는 치밀하게 관리해도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미국에선 트럼프의 불확실성, 한국에선 국론 분열, 북한에선 벼랑 끝 외교라는 3대 악재가 엉켜있다. 2018년 1월 1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신년사를 통해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기대한다”면서 대표단 파견 의사를 전격적으로 밝혔다. 이 신년사가 마중물이 돼 한반도가 평화의 기운으로 가득 찼었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던 흥분과 설렘은 2년 사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새해라는 단어는 없는 희망도 샘솟게 하는 마력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년을 생각하면 오히려 가슴이 더 답답해진다. 트럼프의 불확실성과 북한의 벼랑 끝 외교를 자력으로 막을 수 없다면 최소한 국론 분열이라도 줄어드는 새해를 맞고 싶은데, 이마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암울함을 지울 수 없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