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군(軍)에 대한 간섭이 늘어나면서 펜타곤(미 국방부)이 병들고 있다. 정치적 이익 실현을 위해 군 내부 문제를 정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트윗으로 ‘명령 아닌 명령’을 즉흥적으로 내리며 규율을 흐리게 하고, 군이 지켜온 가치를 뒤집으며 군의 반발을 사고 있다.
취임 이래 3년여간 트럼프 대통령은 군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퍼스트’ 기조 아래 독단적으로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를 결정했고, 한국 일본 독일 등 전통의 동맹 국가들을 맹비난하며 군을 당황시켰다. 치적 과시를 위한 지난 7월 4일의 군사 퍼레이드는 ‘군 사유화’ 논란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미 해군특전단(네이비실) 대원을 사면 복권시키려다 이에 반대하는 해군장관을 경질하는 ‘별난 간섭’을 했다.
리처드 스펜서 전 해군장관 경질 사태는 트럼프식 월권의 결정판이었다. 군 내부 문제에 대해 트럼프의 트윗 훈수가 이어졌고 해군 내부에서 반발하자 수장을 갈아치웠다. 군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과 트럼프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는 일 사이에서 벌어진 좌충우돌은 트럼프 시대 군이 겪고 있는 난맥상의 한 단면이다.
대통령과 해군의 충돌은 과도한 ‘애드워드 갤러거 일등중사 구하기’에서 촉발됐다. 네이비실 대원 갤러거 중사는 2017년 이슬람국가(IS) 격퇴 작전 중 포로로 잡힌 17세 비무장 소년병을 사냥용 칼로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지난해 9월 군검찰에 체포됐다. 그는 시신의 머리채를 잡고 기념 셀카를 찍어 ‘시체 셀카’ 논란도 불러일으켰다.
조용히 묻히는 듯했던 갤러거 중사의 사연은 트럼프 대통령과 일부 공화당 의원들이 ‘그는 무죄’라는 논리를 펴면서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다분히 정치적인 수였다. 참전 용사의 처우에 관심이 많은 보수층 유권자들의 입맛에 맞게 전쟁범죄자로 전락한 군인을 ‘전쟁 영웅’으로 복권시켜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의도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갤러거 중사에게 자신의 개인 변호사를 붙여주고 “그가 유죄 판결을 받으면 내 직권으로 사면하겠다”고 했다. 사실상 군 재판에 개입한 것이다.
트럼프 진영의 비호 속에 갤러거 중사는 지난 7월 군법원에서 대부분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시체와 셀카를 찍어 군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혐의에 대해서만 4개월 구금 및 하사 강등 처분이 내려졌다. 이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은 트럼프 대통령은 더 노골적으로 간섭했다.
지난달 15일 해군에 갤러거를 중사로 복권시키라는 지시를 내렸고 해군 측이 반발하자 트위터를 통해 “해군은 갤러거 중사에게 삼지창핀(네이비실의 상징)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윗글은 대통령의 공식 명령이 아니다”며 갤러거 중사에 대한 징계를 강행하려던 스펜서 장관의 결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트위터를 통해 스펜서 장관 경질과 새 해군장관 임명 소식을 알렸다.
스펜서 전 장관은 이후 워싱턴포스트(WP) 기고글을 통해 사건의 내막을 폭로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간섭은 군 재판이 시작된 지난 3월부터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스펜서 전 장관에게 직접 두 차례 전화를 걸어 갤러거 중사에 대한 특급 대우를 압박했다. 압박 덕에 갤러거 중사는 해군 교도소 구금 상태에서 벗어나 일반 사병 막사로 옮길 수 있었다.
스펜서 전 장관은 이후 트럼프 대통령에게 “두 번이나 전화했으니 더는 개입 말아 달라”고 쪽지를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트럼프의 충견’으로 불리는 팻 시펄로니 백악관 법률고문의 전화였다. 그는 “대통령은 계속 개입할 것이며 갤러거의 계급이 복구되길 원한다”고 전했다. 스펜서 전 장관은 기고글에서 “이런 사건까지 통수권자가 개입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대통령은 규율에 따라 윤리적으로 전투해야 하는 군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스펜서 경질 사건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또다른 인물은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이다. 에스퍼 장관은 당초 마크 밀리 합참의장 등과 트럼프 대통령에게 군 절차에 따른 갤러거 중사 징계의 중요성을 직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랬던 그가 경질로 선회한 이유는 스펜서 전 장관이 군 조직체계를 무시하고 백악관과 ‘직접 거래’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스펜서 전 장관은 막후에서 백악관에 접촉해 대통령이 더 이상 군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갤러거의 네이비실 소속 유지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스퍼 장관은 자신을 거치지 않고 백악관과 딜을 시도한 것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경질 발표에서 에스퍼 장관은 “스펜서가 지휘체계를 어기고 비밀거래를 시도했다”며 “그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고 밝혔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번 사태는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스러운 요구를 그나마 반영해주려고 애쓰는 일이 관료들 사이에서 반복되면서 벌어진 참사”라고 분석했다.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간섭하는 상황에서 대통령 의중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던 스펜서 전 장관이 군의 위신도 지키고 대통령 심기도 거스리지 않는 방안을 고민하다 불필요한 무리수를 뒀다는 의미다.
군 장성이나 전문가들보다 자신이 국방·외교정책에 대해 더 잘 안다고 주장해온 트럼프 대통령이 펜타곤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후원자를 자부하면서도 정작 군을 운영하는 장성들은 불신했다. 보고체계를 거쳐 올라온 정보보다 자신이 관심 있는 뉴스 보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군이 지켜온 가치를 흩뜨렸다.
트럼프 행정부 초대 국방장관이었던 제임스 매티스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배제돼 발표 이후에나 그 내용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좌절감을 겪었다. 그는 시리아 철수 문제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 지난해 말 사임했다. 동맹의 가치가 무너지는 일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별난 간섭이 단일 지휘체계로 움직여야 할 군을 둘로 쪼개놓고 있다는 것이다. CNN은 “트럼프는 ‘내 장군들, 내 군대’라고 말하며 군이 국가가 아닌 자기 소유라고 착각하는 듯하다”고 평가했다. 전현직 군 관료들을 인용해 미군이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되고 있다는 지적도 했다. ‘트럼프가 뒤를 봐준다’고 믿는 맹신자와 ‘군은 정치에서 독립돼야 한다’는 신념을 지닌 다수의 군 고위 간부로 쪼개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