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기회의 사다리’… 공교육에 남겨지면 슬픈 시대

입력 2019-12-10 04:01

“돈 없으면 대학 말고 기술 배워야.”

1970, 80년대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 예산 75조원을 공교육에 투입한 2019년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잘 언급되지 않는 통계 하나를 들여다보자. 정부는 저소득층 가정에 교육급여를 지급하고 있다. 중간 소득계층의 절반에도 소득이 미치지 못하는 가구(4인 가족 월소득 230만원)에 부교재비나 학용품비 등을 지원한다. 교육부가 집계한 ‘2017년 학생 수 대비 교육급여 지원현황’(2018, 2019년 통계 없음)을 보면 특성화고 학생 가운데 교육급여 대상자는 17%였다.

일반고·자율고·특수목적고 비율은 훨씬 낮다. 특목고가 4%로 가장 적다. 자율형사립고는 5%, 일반고 6%, 자율형공립고 7%다. 특성화고엔 대학 진학을 미루거나 접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려는 학생이 모인다. 이 학교들의 저소득층 비율이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이 주로 모인 학교보다 최대 4.25배 많다. 공교육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기회 균등이다. 하지만 우리 공교육은 ‘흙수저’를 걸러내는 거대한 ‘필터’처럼 작동한다.


유아∼고교까지 점점 벌어지는 격차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사교육걱정)이 2016~2018년 서울 소재 유아대상 영어학원(영어유치원)과 사립초등학교 학부모부담금을 분석해보니 영어유치원은 월평균 103만7000원이었다. 4년제 대학등록금보다 비싸다. 사립초는 연평균 학부모부담금이 855만원으로 집계됐다. 서울에 있는 학교는 1016만원이다. 국공립 초등학교의 9.3배에 달한다. 전국 사립초 87.7%는 전국 평균 대학등록금 667만원보다 더 많은 돈을 내야 다닌다. 영어유치원 2년과 사립초 6년 학비를 합하면 최대 1억3500만원까지 치솟는다.

헛돈을 쓰는 것일까. 어릴 때 경험은 향후 성인까지 성장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교육부가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을 때 활용하는 개념이 있다. 인적자본 투자 대비 회수율이다. 국가나 사회가 한 사람에게 1이란 투자를 했을 때 추후 얼마나 이 비용을 회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릴수록 효과가 좋다. 유아 시기 1을 투입하면 8이 회수된다. 초·중·고 학생 때 1을 넣으면 3이 회수되고, 성인의 경우 교환비가 1대 1이다. 미취학부터 초등학교 때 발생한 격차를 줄이려면 향후 더 많은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초등학교 입학 뒤 격차가 더욱 벌어진다. 교사가 다수 학생을 가르치다보니 수업을 이해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A를 이해해야 B로 넘어가고 C로 이어질 수 있다. 학년·학교급이 올라갈수록 모르는 게 쌓이는데 학습 분량과 난도가 급격하게 올라간다. 흥미를 잃으면 수업은 고통이 된다.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이 1수업 2교사제를 도입하겠다는 공약을 내놓기도 했지만 유야무야됐다.

이 지점에서 사교육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공교육에만 의존해야 하는 학생이 공부에 흥미를 잃어갈 때 사교육으로 관리받는 아이들은 선행학습으로 치고 나간다. 지난 3월 교육부와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를 보면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29만1000원이다. 조사 결과가 처음 발표된 2007년 이후 최대치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소득 수준이 가장 낮은 가구(200만원 미만)는 1인당 9.9만원을 사교육비로 지출했다. 소득이 가장 높은 구간(800만원 이상)에서는 50만5000원가량 지출했다. 격차가 5배 이상 난다. 공교육이 사교육보다 경쟁력이 있다면 사교육에 지갑을 여는 학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걸러진 흙수저들

정보 격차가 서민 자녀를 더 궁지로 몬다. 정부가 정치권 입김에 휘둘려 대입제도를 수시로 바꾸는 바람에 입시 담당 교사들도 혼란스러워하는 지경이다. 현재 고1~3학년은 입시 방식이 다른데 고교학점제 도입과 자사고 등의 폐지로 불확실성은 더 커졌다. 입시 정보뿐 아니라 학교생활기록부를 채워 넣을 때도 정보 격차가 내용 격차로 이어진다. 특허부터 논문·저술까지 학생부종합전형 변천사는 사교육이 발 빠르게 스펙을 개발하고 교육 당국이 뒤늦게 틀어막는 상황의 반복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대학수학능력시험도 공정하다고 보긴 어렵다. 당락을 가르는 초고난도 문항이나 준고난도 문항은 사교육으로 훈련받는 학생이 유리하다. 인터넷 강의만으론 한계가 있다. 초고난도 문항만 뽑아 가르치는 교육특구 학원이 문전성시인 이유다. 사교육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 학생이 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렇게 유아부터 고교까지 흙수저를 걸러 온 현실은 국가장학금 통계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의원이 한국장학재단으로부터 받은 올해 국가장학금 통계를 보면 서울대 수혜자는 24.67%, 고려대는 25.09%, 연세대는 24.86%다. 국가장학금은 기초·차상위에서 8분위까지 소득에 따라 장학금을 차등 지급한다. 소득 상위 20%에 해당하는 9, 10분위 학생과 미신청자는 제외된다. 미신청자 중에는 신입생 때 장학금 신청을 해보고 9분위 이상으로 분류돼 포기했거나 아예 중산층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전국 대학 평균 국가장학금 수혜 비율은 53.88%로 이른바 ‘스카이’의 2배를 넘는다.

학벌은 여전히 강력하다. 사교육걱정이 입법·사법·행정부 고위 공직자의 출신 대학을 분석해보니 국회의원의 47.3%, 대법관 78.6%, 신임법관 63.8%, 검사 67.5%, 차관급 이상 58.8%가 서울대·고려대·연세대 3개 대학 출신이다. 민간 영역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학부모에게 “대입에 그만 매달리라”는 건 무리한 요구다.

공교육 경쟁력 강화가 유일한 해법이라고 오래전에 결론 났지만 정부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학생 줄어드니 교사 줄이자”(예산 당국)와 “미래 교육 위해 더 뽑자”(교육 당국)는 정부 내 해묵은 논쟁에서조차 한 걸음도 못 나간 게 현실이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