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연말이다. 2019년 정부가 추진했던 통일·외교·국방 분야의 주요 과제를 평가하고 2020년을 새롭게 준비해야 한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문재인정부의 100대 국정과제가 올라와 있다. 이 중 통일·외교·국방 관련 과제는 85번부터 99번으로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 가운데 남북 관계 관련 과제가 가장 미진하다. 가장 큰 원인은 북한의 태도 변화다. 김정은은 지난 4월 11일 한국을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로 규정한 후 8월 16일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는 거친 표현을 쓰면서 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다. 북한이 전혀 호응하지 않으므로 ‘한반도 신경제’ ‘남북 기본협정 체결’ ‘남북 교류 활성화를 통한 남북 관계 발전’ 등의 국정과제가 제대로 이행될 수 없다.
그러나 92번 과제인 ‘북한 인권 개선과 이산가족 등 인도적 문제 해결’은 문재인정부가 의도적으로 수행하지 않고 있다. 과제에서 제시된 주요 내용은 북한인권재단 조기 출범, 국제사회와의 공조 및 남북 간 대화 시 인권 문제 의제화 등이다. 문재인정부에서 북한인권법은 사실상 사문화되어 북한인권재단은 출범도 못했고 북한인권기록센터는 아무것도 안 하며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는 여전히 임명되지 않고 있다. 나아가 정부는 11년 만에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제안국에서 빠졌다. 동맹국인 미국조차 ‘2018 국가별 인권 보고서’에서 “한국 정부가 인권단체의 대북 비판을 차단하기 위해 자금 지원까지 모두 중단했다”고 비판한다. 문재인정부가 남북 대화 시 인권 문제를 제기한 기록도 전혀 없다.
인권 증진을 위한 방법은 ‘조용한 접근’ 대 ‘공개적 압박’이 있다. 전자는 인권을 훼손하는 국가 지도자의 체면을 고려하여 비공개 압박을 가하되 실질적인 진척을 중시한다. 공개적 압박은 ‘이름 불러 창피주기’로 세계로 전파되는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과 북한인권 보고서 등이 대표적이다. 북한이 인권 문제를 체제 안보와 연계하여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므로 한국의 ‘공개적 압박’은 남북 관계에 큰 장애가 됨은 이해한다. 그렇다면 문재인정부는 ‘조용한 접근’을 차용하여 스스로가 목표한 국정과제 92의 ‘북한 인권’ 분야를 이행해야 하나 채점이 불가능한 빈 답안지를 낸 것과 같이 아무런 노력이 없다.
북한인권재단의 경우 정부는 여야 간 재단 이사 선임 문제를 이유로 출범을 지연시키고 있다. 북한인권법 11조에 ‘통일부 장관이 재단을 지도·감독’하고, 10조에 ‘통일부 장관이 지정하는 사업’을 수행토록 되어 있으므로 야권이 추천한 인사가 재단 이사로 선임되어도 통일부가 사실상 재단의 역할, 사업, 범위 등을 통제할 수 있다. 정부가 원한다면 조용한 접근이 가능함에도 시행하지 않는 것은 출범 의지 자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인권법 13조에 규정된 통일부 산하 북한인권기록센터는 2항에 ‘북한 주민의 인권 실태 조사·연구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지만 북한 인권 실태 보고서는 한 번도 발간되지 않았다. 연간 10억원의 예산을 사용하나 별도 홈페이지도 없고 주요 활동 자료는 30쪽짜리 북한인권기록센터 홍보 책자뿐이다. 조용한 접근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는 수준이다.
문재인정부는 북한인권법 9조와 국정과제 92번에 모두 포함된 ‘국제사회와 협력’을 위한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도 임명하지 않고 있다. 문재인정부의 대북 정책을 이해하고, 활동 범위와 역할을 조정할 수 있는 인사를 얼마든지 선정할 수 있음에도 정부가 임명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은 북한 인권과 관련된 것을 모두 기피하는 것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북한 인권 향상은 문재인정부가 목표로 하는 북한의 보통 국가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전제다. 2020년, 조용하지만 실질적인 노력이 최소 수준이라도 시작되기를 송구영신의 마음으로 바란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