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않은 날
자정의 푸른 숲에서
나는 당신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창가에 늘 푸른 미루나무 두 그루
가을 맞을 채비로 경련하는 아침에도
슬픈 예감처럼 당신의 혼은 나를 따라와
푸른색 하늘에 아득히 걸렸습니다.
나는 그것이 목마르게 느껴졌습니다.
탁 터뜨리면 금세 불꽃이 포효할 두 마음 조심스레 돌아 세우고
끝내는 사랑하지 못할 우리들의 우둔한 길을 걸으며,
'형이상학'이라는 고상한 짐이 무거워
시인인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내 핏줄에 실어버릴 수만 있다면,
당신의 그 참담한 정돈을 흔들어버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다시 한 번
이 세계 안의 뿌리를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하늘로 걸리는 당신의 덜미를 끌어내려
구만리 폭포로 부서져 흐르고 싶었습니다.
고정희의 ‘이 시대의 아벨’ 중
1948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시인은 스물일곱이던 75년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삶의 이면을 치열하게 살핀 작품을 쏟아냈으나 91년 지리산에 오르다 실족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런 사연 탓인지 시집에 담긴 작품을 읽다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시대의 아벨’은 83년에 세상에 나왔지만 이후 품절돼 많은 독자의 아쉬움을 샀던 책이다. 뒤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제도적 억압의 굴레를 극복하려는 힘, 그것이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의 시는 항상 자유의지에 속해 있는 하나의 에너지였다.”